[narrative report]두 번의 ‘자살’… 세 번째 삶을 살아가는 70대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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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살아내야 할 이유들이 사라져갔다 그런데 문득…

《동아일보가 이야기체 기사인 내러티브 리포트를 독자 여러분에게 본격적으로 선보입니다. 이를 위해 동아일보는 취재진과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실전 내러티브 연구회’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을 감성적인 문체로 담아낼 내러티브 리포트를 기대해 주십시오.》

해외건설맨… 家長…
그의 발자국이 찍힌 아파트단지는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다. 서울 강남의 유명 종합병원도 그의 손을 거쳤다. 대기업 건설사 현장감독으로 집보다 공사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해외 공사 현장에도 나가 외화를 벌어 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모 씨(70)는 자부심도 크고 자존심도 강하다.

1998년 그는 해외 빌딩 건설 현장을 지휘하기 위해 2년 주재 계획으로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탔다.

“계획대로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면 그런 일은 전혀 없었을 겁니다. 다 내 잘못이지, 누굴 원망하겠어요.”

2년을 채워갈 무렵 찾아온 회사 간부는 일단 술부터 권했다. 목구멍을 싸하게 태우는 독주를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까지 마셨을 때쯤 회사 간부가 ‘본론’을 꺼냈다. “2년만 더 있어 주시죠.”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버석한 모래 씹히는 식사가 싫어 집에 갈 날을 손꼽고 있던 이 씨였다. 완공은 보고 싶었지만 아내와 딸, 아들은 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아있으면 서울보다 돈을 더 벌 수 있었다. 머릿속은 술이 깬 뒤에도 어지러웠다. 그해 그는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도박에 빠진 처남, 모든 게 무너졌다
서울엔 2001년 들어왔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버지를 맞은 딸의 얼굴이 모든 걸 설명했다. 10억 원이 넘는 돈이 있던 통장부터 집문서까지 남은 게 없단다.

식구들 중 아무도 목사인 처남이 도박에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식구들의 ‘발등’을 찍었다. 도박장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결론은 뻔했다. 가진 재산을 탕진하고도 진 빚이 40억 원이 넘는다고 했다. 패가망신하고도 도박을 끊지 못한 처남은 여기저기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평생 모았던 이 씨의 전 재산 역시 처남의 손끝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집에서 가장 믿었던 아들에게 통장을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처남은 아들을 꾀어 모든 걸 가져갔다. 처음엔 의심했던 아들도 처남이 날짜를 정한 각서까지 쓰자 의심을 거뒀다. 돈을 모두 날린 처남은 유럽으로 도망갔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집문서를 넘겨준 아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신경쇠약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친정 일 때문에 싸움이 잦아진 딸 내외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 남편 얼굴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던 아내는 집을 나갔다.

이 씨는 생업을 내려놓고 아내를 찾아 나섰다. 한 달 만에 찾아낸 아내는 전남 진도에 있는 동서 댁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를 데려올 수 없었다. 갈 곳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가장에게 가족은 삶의 전부였다. 생(生)의 의미가 사라진 자리엔 우울증이 파고들었다. 모래 밥을 씹으며 해외 건설 현장을 뛰었던 이 씨는 어느새 집 없는 부랑자 신세가 돼 있었다.

2005년 11월 17일. 절벽.
3년째 삶에 끌려가던 어느 날 아내의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위태위태하던 이 씨의 마음이 무너졌다. 허겁지겁 진도로 내려갔을 땐 이미 화장이 끝나 있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내의 소식을 이 씨는 그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게 다 내 탓이지. 내가 누굴 원망하겠어. 다 내 탓인걸….” 담담히 인터뷰하던 이 씨의 눈이 빨개졌다.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2005년 11월 17일. 희한하게 날짜가 정확히 기억이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산에 올라와 있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힘이 빠질 때까지 서럽게 울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순간 가장 절망적인 생각이 파고들었다. 죽자. 이 씨는 절벽을 찾아 몸을 던졌다.

이 씨는 죽지 못했다. 정신이 들어보니 웬 차에 누워 있었다. 운전하는 청년이 병원에 간다고 했다. 청년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이 씨를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원수 같은 돈 생각이 먼저 났다. “병원은 안 된다”고 청년을 졸랐다. 청년은 이 씨를 가까운 구청으로 데려갔다. 보건소 생각이 난 모양이다.

이 씨의 상태를 확인한 서울 성북구 측은 일단 심하게 부러진 다리부터 치료했다. 성북구 정신보건센터에서는 이 씨를 자살위험자로 등록했다. 복지정책과에서는 노숙인 생활 때문에 말소된 이 씨의 주민등록을 성북구 관내로 옮기고 작은 방을 잡아줬다. 월세와 식비로 쓸 최저생활비가 지급됐다.

죽음의 충동은 그래도 계속됐다. 부러진 다리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좁은 방 안에서는 ‘현재’를 더 절망적으로 만드는 ‘화려한 과거’가 더 자주 떠올랐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웠다. 다음 해인 2006년 이 씨는 방에서 두 번째 ‘시도’를 했다. 스스로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번엔 생필품을 전해주러 온 공익근무요원이 바닥에 흥건한 선혈을 보고 구에 신고했다. 이 씨는 또 살아남았다.

솔직한 질문, 마음의 문 열다
청소년들은 ‘성적 비관’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자살을 생각할 수 있지만 노인은 다르다. 이 씨에게도 의식주 문제 해결이나 병원 진료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이걸 치료해야 했다. 성북구 정신보건센터는 노인자살예방프로그램을 시행하는 한국생명의전화 종합사회복지관에 이 씨를 소개했다. 이 씨를 담당하게 된 복지사 김주희 팀장은 이 씨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모른 상태로 처음 만났다. 복지기관 사이에서도 복지수혜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건강상태나 경제사정 등 꼭 필요한 현재 상황 외에는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수혜자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김 팀장은 백지에 이 씨의 모습을 그려 나가야 했다.

이 씨는 처음엔 경제적 문제 해결만을 요구했다. 쌀 좀 달라. 이것저것이 필요하다. 뭐 먹고 싶다…. 김 팀장은 이런 얘기들을 다 새겨들었다. 이 씨는 자기 말을 들어주는 김 팀장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는 두 번의 자살 경험을 비롯한 거의 모든 것에 대해 팀장과 상담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 씨가 돌아간 뒤 김 팀장은 기자에게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저는 어르신이 부인과 이혼한 줄 알았어요. 사별하신 줄은 전혀 몰랐네요.”

김 팀장에게도 하지 않았던 부인의 자살 얘기를 이 씨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 털어놨다. “가족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본 점, 어르신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 점, 이런 점들이 어르신의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노인들의 자살을 막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묻는 사람이 위축되면 안 된다. 노인들은 마음도 입도 닫는다.

상담 결과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는 자괴감이 컸다. 여기에 기본적인 식사 해결도 안 되는 독거 생활, 당뇨와 고혈압 같은 각종 질병 등. 이런 요인들이 모여 이 씨의 머릿속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것들을 치료해야 했다.

자괴감을 자신감으로 바꾸는 상담이 이어졌다. 이 씨는 “김 팀장 덕분에 살고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김 팀장은 이 씨가 가끔 “요즘도 죽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할 때마다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저는 어떡해요”라고 답한다. 김 팀장은 이 씨에게 든든한 버팀목인 동시에 ‘세상을 살아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내 탓이다”에서 “내 덕분이다”로
얼마 전부터는 극단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연습인 동시에 함께 준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성을 찾는 연습이기도 하다. 이 씨처럼 복지관에 나오는 노인들이 연습해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순회공연을 한다. “거기 가면 내가 제일 어려서 다 형님들인데, 보면 나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사람도 있더라고! 그 사람들 보면서 아,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지.” 극단 ‘형님들’ 얘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이 씨의 어깨가 쫙 펴져 있었다. 자책감에 빠져 있던 이 씨는 연극을 통해 남을 돌아보는 시선을 되찾게 됐다.

병원 진료도 계속됐다. 성북구 노인자살예방센터는 인근의 민간병원에 이 씨를 소개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한 정신과 진료와 성인병 진료를 받는다. 복지관에서는 혈당과 혈압을 낮출 수 있도록 싱거운 식사를 점심 저녁마다 챙겨주고 있다. 매 끼니를 복지관에서 해결하지만 이 씨는 당당하다. 이 씨도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함은 ‘복지관 모니터 요원’. 사회적 역할을 주고 자신감과 책임감을 되찾게 하기 위한 조치다.

동아일보 5일자 A14면에 게재된 노인자살 예방 기획보도. 본보는 자살충동이 심해 자살예방센터에서 치료를 받아온 노인들을 만나 이들의 고민을 소개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동아일보 5일자 A14면에 게재된 노인자살 예방 기획보도. 본보는 자살충동이 심해 자살예방센터에서 치료를 받아온 노인들을 만나 이들의 고민을 소개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관리도 계속되고 있다. 이 씨는 지금도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한 번씩 걸어오는 전화를 받고 상담을 한다.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지만 혼자 사는 이 씨에겐 너무나 반가운 전화다. ‘텔레체크’라고 부르는 이 서비스는 노인 자살 예방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이탈리아 등 일부 선진국에서 활성화되어 있는 정책이다. 인근 경찰서와 소방서 등에서도 이 씨의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할 경우 현장 순찰 등 도움을 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씨는 지금도 가끔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씨에겐 지금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서야 할 무대가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건강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훨씬 많다. 그래서 이 씨는 살아있다. “조금 있으면 구청에서 연극도 한다”고 자랑하는 이 씨에게 그때 꼭 뵙겠다고 약속했다. “신문사랑 인터뷰한다”며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뒷모습이 아름답다.

취재후기: 오늘도 벼랑 끝에 선 노인들
노인 자살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08년 한 해에만 61세 이상 노인 402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문가들은 “자살을 시도하는 노인의 수는 자살로 사망한 노인의 수보다 열 배가량 많다”고 말한다. 4만여 명의 노인이 오늘도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본보 5일자 A1·14면 참조
벼랑 끝의 어르신들… 61세이상 노인 자살 20년새 5배로 증가
“내가 정신병자냐” 상담 꺼리다 최근 예방센터 찾는 노인 부쩍

노인들은 순간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당연히 해결책도 간단할 수 없다. 동아일보는 두 번의 자살을 시도한 70세 노인 이 씨의 동의를 얻어 자살을 시도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인터뷰했다. 이 씨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숨은 공로자들도 만났다. 이 씨의 사례에서 자살 충동을 느끼는 노인을 찾는 법, 자살을 막을 수 있도록 돕는 법 등을 알 수 있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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