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당한 내가 전학? 도망치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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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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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하기보다 당당하게’… 어느 여중생의 학교폭력 극복기

《학교폭력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지난달 ‘알몸 졸업식 강요’ 파문에 이어 22일에는 한 고등학생이 후배 중학생에게 “너는 내 애완동물”이라며 개 사료를 먹으라고 강요하며 지속적으로 괴롭힌 사건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이처럼 학교폭력의 양상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가운데 “피해자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편견 때문에 피해자들이 다시 한번 고통을 겪는 일이 잦아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보 23일자 A14면 참조
[관련기사]“너는 내 펫” 개사료 먹인 학교폭력

“내가 당했던 일, 다른 아이들도 겪는거 막으려 버텨”

“당한 사람도 문제” 편견… 피해학생에 또다른 고통
“장난일뿐… 부탁한것…” 폭력쓰고도 죄의식 안느껴


지난해 경기도의 한 중학교 1학년생 김성희(가명·14) 양은 입학 뒤 줄곧 같은 1학년생 4명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시도 때도 없이 구박을 당하거나 책상에 욕이 쓰여 있었다. 치마가 걷어 올려지고 물건이 없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가해 학생들이 김 양에게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네 가슴을 스스로 만져보라”고 강요해 억지로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만지면서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다.

이 일을 겪은 다음 날 김 양은 흉기로 등교 중이던 가해 학생 2명의 등을 찔렀다. 다행히 경상에 그쳤지만 김 양은 이후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다. 당시 김 양의 부모가 찔린 학생들과 간신히 합의를 봤지만 김 양은 학교 내에 구성된 학교폭력대책위원회로부터 사회봉사명령과 함께 다른 학생들과 격리되는 징계를 받았다. 10월 말까지 한 달여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지 못하고 상담실에 격리된 채 자습을 하거나 교사가 와서 따로 수업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김 양은 한동안 자신이 괴롭힘을 당했던 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학교는 전학을 권했다. 하지만 18일 경기도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서 만난 김 양은 전학을 택하지 않고 같은 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 김 양은 “내가 당했던 일을 다른 아이들이 겪는 것을 막고 싶어 전학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며 “내가 괴롭힘을 당하다 가해 학생들을 찌른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도망친다는 게 억울했다”고 말했다.

김 양은 “그동안 주위에서 ‘학교폭력은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김 양은 사건이 있은 후 50여 일이 지난 지난해 11월 어느 날 반성문에 그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일을 모두 적어 학교에 제출했다. 그전까지는 전날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반성문에 이 일을 적은 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김 양은 지금은 내성적이었던 성격을 고치고 친구도 폭넓게 사귀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를 괴롭혔던 친구와 복도에서 가끔 만나지만 조금 껄끄럽기만 할 뿐”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가끔 친구들과 그때 이야기를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김 양은 “일부 친구들이 ‘사건 처음 났을 때 신문에 공부 잘한다고 썼더라’라며 다소 거슬릴 수 있는 말을 해도 그냥 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류경돈 경기도청소년상담지원센터 상담원은 “괴롭힘을 당한다고 무조건 전학을 가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피해자는 당당히 학교에 남고 주변에서는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청소년상담지원센터에 따르면 최근에는 학교폭력이 교환이나 부탁의 형식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나중에 문제가 드러나도 “함께 논 것일 뿐” “부탁했는데 들어준 것”이라고 변명하며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수정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학교폭력이 범죄가 아닌 놀이문화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학교나 가정 모두 훈육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향숙 소장은 “사회 전체가 폭력에 둔감해진 한편 폭력적인 게임 등의 대중문화에 노출된 아이들이 현실감과 공감능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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