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다시 보자]<2>벽화로 본 고구려…(2)어떻게 입나

  • 입력 2004년 1월 26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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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반 남포시 용강군 쌍영총 무덤 안칸 동벽에 그려진 승려와 부인의 공양 행렬. 왼쪽 여밈식 저고리에 주름치마 투피스(왼쪽부터 첫째, 셋째, 넷째)는 고구려 여성의 전형적 옷차림이다. 오른쪽의 점무늬 투피스 차림은 5세기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5세기 후반 남포시 용강군 쌍영총 무덤 안칸 동벽에 그려진 승려와 부인의 공양 행렬. 왼쪽 여밈식 저고리에 주름치마 투피스(왼쪽부터 첫째, 셋째, 넷째)는 고구려 여성의 전형적 옷차림이다. 오른쪽의 점무늬 투피스 차림은 5세기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사람들은 정말 실용적인 옷을 입었다.

고구려 복장은 남녀 모두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바지 위에 주름치마를 걸친 차림이 많다. 저고리는 남녀 모두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다. 말을 타던 유목생활에서 농경 중심 생활로 정착하면서 완성된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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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저고리의 고구려식 투피스는 세계복식사에서 가장 오래된 최선의 일상복으로, 현대에도 보편적인 패션이다. 고구려 복장이 현대적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쌍영총 무덤 안길 동벽에 그려진 주름치마 입은 여인.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귀족 서민 모두 실용적인 바지저고리 차림

황해도 안악군 안악 3호분이나 평남 남포시 덕흥리 고분벽화의 왕과 왕비, 관료들의 겉옷은 길고 풍성하다. 웃옷과 치마가 한통으로 붙은 포(袍)의 형태다.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 고구려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중국식 관복제도를 일부 상류층이 수용한 것이다. 원피스형의 중국식 겉옷은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그게 불편했던지 5세기 중엽 이후의 벽화에는 원피스형 겉옷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은 귀족과 서민 모두 바지저고리형 투피스를 즐겨 입었다. 다만 신분이 높을수록 저고리의 소매통과 바지통이 넓어졌다. 백제나 신라의 패션도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왕실이나 귀족층은 주로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비단옷을 입었고, 서민들은 무명과 삼베로 무늬가 단순하거나 없는 옷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唐)나라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의 ‘한원(翰苑)’에 나오는 고구려의 ‘오색금(五色錦)’이나 구름무늬의 ‘운포금(雲布錦)’ 등은 고구려의 염직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려준다. 이를 증명하듯이, 벽화에도 꽃자주 진홍 분홍 등의 붉은색 계열이나 노란색 푸른색 등의 원색 천에 연속 문양으로 치장한 옷차림들이 보인다.

고구려에서는 한때 점무늬가 크게 유행했던 것 같다.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장천1, 2호분 등 5세기 중국 지린(吉林)성 퉁거우(通溝) 지방의 고분벽화에 주로 나타난다. 서민층 옷은 물방울무늬로 단순하다. 반면 상류층의 옷에서는 마름모꼴이나 네모꼴에 작은 점무늬가 들어가거나 두줄무늬, 바둑판무늬, 물결무늬 등 복잡해진 패턴 장식이 눈에 띈다.

장천 1호분 앞칸 오른쪽 벽에 묘사된 20여명의 남녀행렬이나 무용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물방울무늬의 패션 축제 같다. 장수왕(재위 413∼491년) 시절 퉁거우 사람들이 점무늬를 아주 좋아한 모양이다. 이는 호랑이 표피의 점무늬를 연상시킨다. 만주 벌판을 질주하던 고구려인의 기개를 잘 반영한 패턴이다.

●베스트 드레서는 진홍색 드레스의 여인

감신총 앞 칸 서벽에 그려진 진홍색 드레스 차림의 여인(왼쪽). 필자가 고구려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은 여성으로 오른쪽은 여인의 원피스 앞치마 를 복원한 모습이다.

서민 여성의 옷은 질박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로 생활복의 멋을 한껏 뽐낸다. 저고리나 두루마기는 앞섶을 개방한 형태로, 오른쪽 섶을 위로 얹은 왼쪽 여밈식이다. 깃과 소매, 도련은 검은색 등의 띠를 둘러 변화를 주고 허리띠를 묶었다.

대부분 잔주름을 잡은 흰색 주름치마는 아래로 넓게 퍼진 전형적인 A라인 스타일이다. 이는 키가 작으면서 좁은 어깨에 굵은 팔, 긴 상체에 하체가 짧고 단단한 우리네 체형과 잘 어울린다.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오는 이른바 ‘한복’의 원형을 보여준다.

남포시의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고분인 쌍영총의 안길 동벽에 시녀로 보이는 세 여인이 나란히 서 있다. 잔주름의 흰 치마에 받쳐 입은 저고리에는 검은색 띠에 붉은 선이 가미돼 있고, 줄무늬와 흰 점선무늬로 수를 놓은 듯하다. 여인들은 의상과 어울리게 양 볼과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라 예쁘게 화장하고 맨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맸다. 5세기 퉁거우 지방의 여성들보다 한층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세련되게 변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베스트 드레서는 평남 온천군에 있는 5세기 초반 감신총의 앞칸 서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손을 합장한 이 여인은 양 갈래로 두 줄씩 머리를 땋아 올리고 뾰족한 코의 신발을 신은 멋쟁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복장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보통 여성과 다르다. 중국옷으로 보이는, 안악 3호분의 왕비나 시녀가 입은 벙벙한 겉옷과도 아주 다르다. 땅에 끌리는 길이의 진홍색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둘렀다.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른 V자형 깃과 소매, 흰색의 둥근 앞치마와 뒤로 묶은 허리띠의 붉은색 두 줄 장식 등 붉은색에 흰색 악센트를 조화롭게 살렸다. 상큼하고 품위 있는 디자인이다.

중국식 포 형태의 영향을 받은 듯하면서도 고구려식으로 다시 꾸민 패션감각이 역력하다. 원피스이면서도 상체의 갸름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허리 아래쪽으로 넓게 퍼진 A라인 의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고구려인이 외국문화를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미술사학과

▼"고구려벽화 그린 화가는 기술직 하급관료"▼

4∼7세기에 제작된 9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주제 선정에서 묘사 방식까지 닮은꼴이 하나도 없다. 동일계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복색이 모두 같지 않고, 같은 주제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러한 벽화마다의 개성은 시대에 따라 많은 화가들이 묘 주인의 신분과 생애를 고려하여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화가의 신분이나 이름이 밝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벽화고분이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이었던 만큼 담당 화가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에 빗대어 보면 벽화가는 궁전이나 사원 건물의 단청과 벽화, 탱화, 초상화 등을 맡았던 기술직 하급관료였으리라 여겨진다.

고구려 화가들과 신분이 가장 비슷한 사람으로는 경주 황룡사 담벼락의 노송도,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 그리고 단군 초상을 그렸다는 신라의 솔거(率居)가 떠오른다.

당시 신라의 공예가로 범종을 만드는 종박사(鐘博士)가 오두품(五頭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솔거나 고분벽화를 그린 화가도 비슷한 정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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