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2000/테크노음악]테크노집단 '펌프 기록'

  • 입력 2000년 1월 9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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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R빌딩 지하에는 ‘펌프기록’(PumpGirok)이라는 이름의 ‘결사체’가 있다. 이같이 요상한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구성원들은 “방금 펌프질해 길어올린 생수같은 첨단 문화를 기록(Record)하자는 취지”라고 말한다. 이들이 밤낮없이 퍼올리고 있는 ‘생수’는 최근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테크노 음악이다.

국내 테크노 DJ의 원조인 ‘달파란’(본명 강기영·34)을 비롯해 ‘트랜지스터 헤드’(본명 민성기·29), DJ ‘에이 샤’(본명 최고은·23), DJ 최기준(22) 등 전문 테크노 뮤지션과 PC통신 하이텔의 테크노동호회 ‘21세기 그루브’의 시솝(운영자)인 강미라(30), 그룹 ‘어어부 밴드’의 백현준(28), 모 패션회사의 머천다이저 광고팀장 아트디렉터으로 각각 재직 중인 조성준(30) 박희정(28) 백현희(33) 등 기획요원, 그리고 해외 정보원인 일본인 아츠코 하토리(31) 등 10명이 모여 지난해 1월 뭉쳤다.

▼뮤지션-애호가-그룹 한자리▼

DJ는 대부분 다른 음악을 하다 장르를 테크노로 바꾼 경우이고, 기획자는 테크노 애호 직장인들. 이들은 ‘주경야음(晝耕夜音)’하며 테크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일부 마니아만 즐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이들은 당초 음악적 교류를 위해 모였지만 지난해 8월 이후에는 매달 1회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입구와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 테크노 클럽들에서 테크노 페스티벌 ‘아우라소마’를 열고 있다. 관광객까지 모으면서 외화벌이에 한 몫 하는 독일의 ‘러브 퍼레이드’, 일본의 ‘레인보우 2000’, 영국의 ‘트라이벌 게더링’ 등에 비하면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앞으로 이들에 맞먹는 축제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 테크노를 생활 속에 정착시키자는 전략도 들어 있다.

가사와 음정 없이 무한 반복되는 컴퓨터 비트 음악인 테크노는 춤과 가장 강력한 ‘화학적 결합’을 일으키는데 이들, 특히 DJ가 하는 일은 무당(巫堂)과 흡사하다. 1만∼2만원의 입장료를 낸 손님들을 몇 시간씩 넋놓고 춤추게 해 집단 가무를 유도하는 것. 달파란은 “6시간동안 춤추는 사람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페스티벌 '아우라소마'주최 붐조성▼

지난해 11월에는 연령층 확대에 도전했다. 테크노 클럽에서 튼 음악을 소형 녹음기에 담아 점심 시간 무렵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에 모인 노인들을 찾았다. “어르신들 한 번 들어보세요”라는 달파란과 트랜지스터 헤드의 말에 처음에는 “설운도나 틀어!”라는 노인들의 고함이 빗발쳤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20여분을 틀었더니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생전 처음 듣는 테크노에 한복 차림의 노인들이 고무신을 비볐고, 이성의 말동무를 만난 노인들은 사교댄스를 췄다. 강미라는 “그곳에서 한국 테크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창작음악 파일에 담아 해외 전파▼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테크노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이런 ‘투쟁’을 하고 있을까? “사실 처음에는 유행 좇아서” 라던 달파란은 이제 “테크노는 음악 장르 중 하나가 아닌, 21세기형 음악 그 자체이고 디지털 혁명의 온갖 양식의 집결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들은 앞으로 음악 유통방식도 바뀔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곡당 1.3MB 크기(플로피 디스켓 한 장)의 미디파일로 전환해 일본 등 외국의 테크노 클럽으로 보낸다. 이것들이 모이면 곧장 앨범이 된다. 최기준은 “이를 위해 서구 테크노 뮤지션들은 보유 장비의 표준화를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테크노 붐을 서구 음악의 유행으로 보는 일부의 시각에 이들은 ‘UFO론’을 들고 나온다. 사람들이 하늘에 떠있는 UFO를 보고 “이건 미제, 저건 일제”라고 하지 않듯 테크노는 결코 특정 국가의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의 대표적 ‘글로벌 맨’인 비디오 아키티스트 백남준의 말을 응용해 신조어를 만들었다.

“한국인들은 이미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아무리 글로벌한 것을 추구해도 한국적인 색채는 드러나게 돼 있다. 그러니 이번 세기에는 서구 꽁무니를 따라 다니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테크노하자!”

▼키워드▼

△Cut& Mix= 기존의 음을 컴퓨터를 이용해 자르거나 붙여서 제3의 음을 창조하는 작업의 통칭. 일종의 ‘혼성모방’. 달파란에 따르면 “창조하기 위해 별도의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재활용한다는 것”. 쉽게 말해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 하나의 테이프에 담아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처럼 또다른 ‘가치’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테크노 뮤지션들이 음악을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을 일컫는 말이면서도 테크노의 요체가 담긴 말.

△트랜스= 초월이라는 뜻의 ‘Transcend’의 약칭. DJ들이 무한 반복되면서 일정한 ‘주파수’를 갖춘 테크노 음악을 들려 줘 사람들이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춤추는 현상을 뜻한다. 이는 대개 집단적으로 이뤄진다.

음악적으로 기승전결을 갖췄으며 듣는 이들을 ‘엑스터시’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농악이나 사물놀이와 흡사하다고 이론가들은 분석.

△PLUR=Peace Love Unity Respect (평화,사랑,하나됨,존경)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외국에서는 테크노의 캐치프레이즈로 통용되고 있다. 음악과 집단가무 등을 통해 사람들 간에 인간적 일체감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일부 평론가들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특성의 테크노가 타장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안해낸 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인근 클럽들에서 일부 유학파들이 “플러 플러!”를 외치는 장면을 간혹 볼 수 있으나, 국내에서는 이런 정서적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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