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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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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동아일보입력 2010-10-11 03:00수정 2010-11-2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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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물고문 질식사” 특종보도… 6월항쟁 불씨 댕겨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동아일보의 심층취재가 아니었다면 덮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담당 수사관 의 고문 사실을 공식 인정한 당국의 발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87년 1월 19일자 1면,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이 축소 조작됐음을 보도한 같은 해 5월 22일자 1면, 사건 뒤 이를 묘사한 동아일보 삽화(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물고문 도중 질식사.’

충격적인 제목이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로 올랐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사망이 수사관의 물고문 때문이었음을 인정하는 경찰의 공식 발표와 함께 사건의 전모를 전하는 기사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자체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박 군의 사망 원인을 규명한 결과 담당 수사관의 고문에 의한 사망임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 놓은 1987년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심층 취재가 없었다면 자칫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21세의 박 군은 14일 주요 수배자인 친구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경찰에 강제로 끌려간 뒤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박 군이 식사 후 조사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차 안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당시 유행어가 여기서 생겼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월 16일자 보도에서 박 군의 삼촌 박월길 씨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 군은 두피 아래 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에 멍자국이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하며 그의 죽음이 단순한 쇼크사가 아님을 처음 주장했다. 사회면에 ‘대학생 경찰조사 받다 사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고문 드러나면 수사관 구속’이라는 부제를 붙여 고문으로 숨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어 17일자부터는 박 군의 시신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 씨와 부검에 입회한 한양대 부속병원 박동호 씨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고문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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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자 ‘김중배 칼럼’은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제목으로 박 군 사망 사실을 다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동아일보를 읽은 독자들은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박 군의 사인을 꼭 밝혀 달라” “동아일보를 믿는다”며 부탁했다. 동아일보가 특별취재반을 구성해 총력 취재에 나선 가운데 경찰은 19일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고문이 단순한 사법적 인권의 차원을 넘어 국가권력의 도덕성 문제로까지 비화한 데는 이에 앞서 1986년에 벌어진 두 사건이 징검다리가 됐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고문사건이다. 이 두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박 군 사건은 정권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극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개헌협상을 백지화하고 간선제 헌법대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호헌회귀(護憲回歸)’를 발표함으로써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동아일보는 박 군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경찰 고위간부들이 이를 축소 은폐 조작했다는 사실을 연이어 폭로했다. 5월 22일에는 1면 머리기사로 ‘치안본부 간부들이 범인축소 조작을 모의했다’는 내용을 특종 보도했다. 이튿날에는 ‘법무부와 검찰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2월부터 경찰 상급자들의 범인축소 및 사건은폐 조작 사실을 알고도 수사지휘권 발동을 포기했다’고 폭로했다.

이 일련의 보도는 엄청난 회오리를 몰아왔다. 야당과 재야단체는 즉각 ‘박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6월 10일 전국 규모의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6월항쟁의 시발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가 항쟁의 불씨가 된 셈이다.

동아일보는 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아일보 기자 132명은 5월 25일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주장’을 채택했다. 정부의 언론통제 철폐, 구속된 언론인 석방을 촉구하고 언론자유 회복과 공정보도를 다짐하는 성명이었다. 언론계에선 처음 나온 이 시국성명은 다음 날 일본 아사히신문에 상세히 보도됐고 AP통신을 통해 세계로 전해졌다.

6월 10일 호헌규탄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일제히 열리면서 6월항쟁의 막이 올랐다. 하루 전인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자 국민의 분노와 저항감은 더욱 커졌고 항쟁의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 군이 결국 숨을 거둔 뒤 7월 9일 열린 이 군의 장례 때는 전국에서 1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애도 물결에 합류했다.

동아일보는 ‘6·10 시위 전국 3831명 연행’ ‘22개 도시 대행진 강행 초긴장’ ‘37개 시읍에서 대행진 공방 대도시 심야까지 격렬시위’ 등의 제목으로 6월 항쟁과 관련한 내용을 6월 한 달 동안 22차례나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네 번의 일요 휴간을 감안하면 사실상 거의 매일 6월 항쟁 기사를 1면 톱으로 다룬 셈이다.

정부는 더 버티기 어려웠다. 6월 29일 오전 10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개헌 약속’을 포함한 ‘6·29선언’을 발표했다. 민권이 마침내 승리를 이룬 것이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민주화를 향한 대결단’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6월 항쟁 집중 보도를 마무리했다. 사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87년 6월 29일이 민주발전사에 빛나는 첫 페이지가 되도록 여야 정치인과 국민 모두가 다 함께 힘을 합해 노력하자.’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안기부 “이후락 인터뷰 빼라” 신동아 인쇄막아 ▼

1987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내용을 담은 ‘신동아’ 10월호 인쇄를 중단시키자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이 항의농성을 벌이고 있다. 7박 8일의 철야농성은 신동아 정상 제작이라는 승리와 함께 자유언론의 터전을 넓히는 성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87년 9월 20일 오후 9시 30분경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수사요원 7명이 동아인쇄공업의 윤전실을 점거해 시사월간지 ‘신동아’ 10월호의 인쇄를 물리적인 힘으로 중단시켰다. 신동아 10월호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최초로 인터뷰해 그로부터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 과정을 담은 생생한 증언 기사를 싣기로 돼 있었다. 안기부는 기사가 한일 간 외교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러한 당국의 강압적인 제재 조치에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은 21일 기자총회를 열어 ‘신동아 제작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출판국 기자들은 “이후락 씨 증언 수록은 그동안 가려져 온 진실을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번 관계 당국의 ‘신동아’ 제작 저지 행위는 또다시 언론자유를 유린하려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밝혔다. 정부 측이 이 기사를 삭제하면 요원들을 철수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기자들은 단호했다. 22일부터는 편집국 기자들과 출판영업국 직원들도 철야농성에 동조했다.

‘신동아 사태’는 동아일보가 9월 23일자 사회면에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신동아 기자 등 80명 3일째 농성’이라는 제목과 ‘이후락 씨 증언기사 관련 당국 인쇄저지 항의’라는 부제를 단 기사는 5공화국 들어 언론탄압에 대한 언론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도한 첫 사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계층에서 격려 전화가 쇄도했으며 재야단체와 다른 언론사들도 지지 성명을 채택했다.

AP, 로이터, AFP통신 등 외국 언론도 이 사태를 집중 보도했다. AFP통신은 “한국 기자들이 정부 당국의 기사 보도금지 조치에 항의함으로써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사태는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진상조사, 민주당의 조사위원회 구성,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의 탄압중지 촉구 성명, 국회 문공위 개회, 당정 협의 등을 거쳐 28일 안기부 측이 인쇄중지 조치를 철회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마무리 성명을 통해 “국익 침해 여부는 정부의 자의적 해석에 맡길 수 없으며 국민의 알 권리와 비교 교량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밝히고, “언론자유 쟁취를 위해 주체적으로 싸움의 대열에 참여했던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본다”고 맺었다. 신동아 10월호는 40만 부가 판매됐다. 이는 당시 웬만한 일간신문 유료 구독 부수를 뛰어넘는 숫자였다.

‘신동아’가 정권에 대한 비판 보도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것은 이뿐 아니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신동아는 당국으로부터 20차례에 걸쳐 제재를 받았다. 연행조사 4차례, 기사 전면 삭제 7차례, 부분 삭제를 포함한 수정이 9차례였다.

1984년 10월호 발간을 앞두고 신동아 편집진은 ‘대토론 1988년’을 마련했다.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하려던 이 공개토론의 내용 게재는 당국의 제재로 무산됐다.

1986년 5월 안기부는 6월호 ‘개헌 대토론’ 특집기사 가운데 ‘김대중 씨가 말하는 개헌 방향’의 삭제를 요구했다. 신동아가 거부하자 안기부 수사요원 4명을 인쇄처인 동아인쇄공업에 파견해 인쇄 공정을 중단시키고 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그해 9월호 ‘부천서 성고문 사건’ 기사는 안기부의 제재로 절반 이상 삭제됐으며, 12월호에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박형규 목사의 인터뷰와 ‘유신 체제하의 고문’ 기사가 실리지 못했다.

1987년 1월호에서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김한조의 증언 ‘나는 박 대통령의 대미 밀사였다’를 삭제하라는 안기부의 압력에 따라 기사를 빼고 표지와 목차를 지운 뒤 다시 작업해 발행해야 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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