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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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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그만 사랑 노래[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1〉

    조그만 사랑 노래[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1〉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 202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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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0〉

    힘[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0〉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그러나 내게는 상처도 보석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베인 아픈 흉터 몇 개 밑줄 쳐 새겨 둔 듯한 어제의 그 흔적들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힘인지도 모른다 몇 군데 옹이를 박은 소나무의 푸름처럼 ―박시교(1947∼ )니체는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

    • 20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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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 한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9〉

    저녁 한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9〉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

    • 202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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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8〉

    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8〉

    날이 흐리다/곧 눈이 흩날릴 것이고/뜨거운 철판 위의 코끼리들처럼 춤을 추겠지/커다랗고 슬픈 눈도 새하얀 눈발도 읽어내기 어렵다/저 너머에만 있다는 코끼리의 무덤처럼 등이 굽은 사람들/시곗바늘 위에 야광별을 붙여놓은 아이는 아직 시간을 모른다/낮과 밤을 모르고/새벽의 한기와 허기를 모…

    • 202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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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눈[나민애 시가 깃든 삶]〈377〉

    첫눈[나민애 시가 깃든 삶]〈377〉

    여자는 털실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스테인리스 대야에 파김치를 버무린다.스테인리스 대야에 꽃소금 간이 맞게 내려앉는다.일일이 감아서 묶이는 파김치.척척 얹어 햅쌀밥 한 공기 배 터지게 먹이고픈 사람아.내 마음속 환호는 너무 오래 갇혀 지냈다.이윤학(1965∼)

    •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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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국행 눈사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6〉

    천국행 눈사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6〉

    (상략) 그러나 그 눈사람은/예전에 알던 눈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거의 기를 쓰고 눈사람이 되어보려는 눈덩이에 가까웠고/떨어져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아보려는 새하얀 외침에 가까웠고/그건 퇴화한 눈사람이었고/눈사람으로서는 신인류 비슷한 것이었고/눈사람은 이제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

    • 202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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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치밥[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5〉

    까치밥[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5〉

    (상략) 외롭고 슬픗할 때면 감나무 아래 기대 앉아서 저문 햇빛 수천 그루 노을이 되어 아득하게 떠가는 것 보았습니다. 흐르는 노을 그냥 보내기 정말 싫어서 두 손을 꼭 잡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밤이 되면은 감나무는 하늘 위로 달을 띄워서 하늬바람 가는 길 내어 주지요. 사…

    •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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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냥 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4〉

    그냥 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4〉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이성선(1941∼2001)선생이라는 직업이 점차 사라져 간다고 한다. 아이들은 줄어들고 인터넷과 녹…

    •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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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붕 위의 바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3〉

    지붕 위의 바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3〉

    바위를 품에 안고 지붕을 오르는 사람이 있다/해풍에 보채는 슬레이트 지붕을 묵직히/눌러놓으려는 것이다 나도 여울을 건너는 아비의 등에 업혀 있던 바위였다/세상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당신은 나를/업어보곤 하였단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혼자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그때 나는 새였다 새…

    •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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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2〉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2〉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

    • 202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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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딛고[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1〉

    딛고[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1〉

    선한 이여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선한 이여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어떻게 벗어날…

    • 20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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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0〉

    눈[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70〉

    맷돌구멍 속 삶은 콩들이 쭈뼛쭈뼛 자리를 바꾸는 까닭은 너 먼저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게 아니다 온 힘으로 몸을 굴려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싹눈을 그 짓무른 눈망울을 서로 가려주려는 것이다 눈꺼풀이 없으니까 삶은 눈이 전부니까 ―이정록(1964∼)1930년대에 시인 …

    •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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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탁[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9〉

    육탁[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9〉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육탁(肉鐸) 같다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하략)―배한봉(1962∼ )

    •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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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극한 직업[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8〉

    초극한 직업[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8〉

    삼짇날부터 쭉, 초가 제비집 옆에 새끼를 밴 어미거미 베틀에 앉았다 북도 씨줄도 없이 ―김춘추(1944∼ )한국인에게 제비는 낯설지 않다. 제비를 본 적도 없는 어린애들도 이 새를 안다. 심지어 좋아한다. 이게 다 ‘흥부와 놀부’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제비는 은혜와 원한이…

    • 20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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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기러기[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7〉

    가을 기러기[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67〉

    흰 서리 이마에 차다 무릎 덮는 낙엽길 구름 비낀 새벽달만 높아라 가을 별빛 받아 책을 읽는다 단풍잎 하나 빈 숲에 기러기로 난다 ―이희숙(1943∼)열일곱 번째 절기, 한로(寒露)가 찾아왔다. 이 바쁜 세상에서 누가 절기를 기억할까. 한로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점점 잊혀지고 …

    • 202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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