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넉넉한 재력-열정은 기본… 모험 즐기는 男子의 도전이 빛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현대의 젠틀맨 드라이버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커스토머 레이싱이 인기다. 벤틀리 제공
현대의 젠틀맨 드라이버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커스토머 레이싱이 인기다. 벤틀리 제공
필자가 연재하는 칼럼의 이름에는 ‘젠틀맨 드라이버’라는 말이 들어간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사 운전자’ 정도가 될 것이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신사답게 법규를 지키며 매너 있게 운전하는 젠틀맨 드라이버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제목을 지을 때 독자 여러분 모두 신사적인 운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지만 실은 젠틀맨 드라이버라는 말에 담겨 있는 다른 의미가 이 칼럼의 제목으로 삼은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젠틀맨 드라이버라는 표현은 모터스포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모터스포츠에 참여하는 프로 팀은 경주차를 준비하고 그 경주차를 몰 프로 드라이버를 고용해 경주에 출전한다. 팀에 고용된 드라이버는 당연히 팀으로부터 출전하는 대가를 받는다. 직장인에게 회사가 월급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드라이버가 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팀의 일원으로서 경주차를 몰 수 있도록 보장받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경주에 출전하는 드라이버를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젠틀맨 드라이버 또는 젠틀맨 레이서다. 돈을 내고 선수 자리를 확보한다는 뜻에서 페이 드라이버(pay driver)나 라이드 바이어(ride buyer)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젠틀맨 드라이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울프 바나토.벤틀리 제공
젠틀맨 드라이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울프 바나토.벤틀리 제공

사전적 의미는 그렇지만 외국 자동차 애호가들에게는 그 이상의 정서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영국의 모범적 신사를 떠올리게 되는 젠틀맨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젠틀맨이라는 말이 뜻하던 귀족, 귀족은 아니지만 재력이 풍부한 상인이나 지주, 의사나 법률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 등을 아우르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고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 초기 자동차는 귀족과 상류층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들은 그들에게 차를 팔려는 목적으로 경주에 참가해 성능과 품질을 과시했고, 때로는 차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산 차를 과시하기 위해 경주에 출전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 귀족들은 명예와 품격을 중시해 직접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가한 쪽은 손에 기름때가 묻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일반 부유층 사람들과 법률가, 의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스포츠카 경주가 인기 있었던 유럽에서는 평소에는 직업에 충실하고 주말에 경주에 출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과거의 자동차 경주는 자동차의 낮은 기술수준과 기계적 완성도 때문에 거의 서바이벌 게임과 같았다. 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매연은 물론이고 차를 모는 드라이버들은 여러 기계 장치에서 새어 나오는 기름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20세기 초·중반 모터스포츠 현장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보면 경주를 마치고 난 선수들의 모습은 지저분하기가 한결같았다. 방풍안경을 썼던 눈 주변을 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시커먼 기름과 먼지투성이였다. 새롭고 위험한 탈것이었던 자동차로 경주를 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즐기는, 남자의 도전과 열정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처럼 기름과 땀으로 범벅이 되는 모터스포츠의 거친 세계에서, 주말이면 세련된 옷을 입고 경주장에 와서 치열하게 달리며 열정을 쏟고, 경주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품격 있는 삶을 사는 모습은 그 시절 자동차 세계와 연이 닿아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 것이었다. 신사다운 매너와 패션 감각을 갖춘 젠틀맨 드라이버들은 언제나 돋보였고, 그래서 이상적인, 또는 모범적인 경주선수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 들어서 자동차 경주가 전문화되고, 프로 경주의 발전에 따라 상업성이 짙어지면서 젠틀맨 드라이버의 개념이 다소 변질된 면도 없지 않다. 비전문가가 돈을 주고 전문가 자리에 올라서는 방편으로 활용한다는 부정적 의미도 더해졌다. 개중에는 자동차 경주 선수의 삶을 경험해보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도 있었고, 프로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필요한 경력을 쌓는 차원에서 선수 자리를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터스포츠도 단계가 있어, 선수가 상위 경주에 나가려면 하위 경주에서 경험과 경력을 인정받아 상위 경주에서도 활동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재력이 뒷받침된다면 비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경주차를 사서 개인 자격으로 출전하는 아마추어 선수까지도 젠틀맨 드라이버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사전적 정의는 그와 같은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그가 1930년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벤틀리 경주차를 타고 우승했을 당시 모. 벤틀리 제공
그가 1930년대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벤틀리 경주차를 타고 우승했을 당시 모. 벤틀리 제공

일반적인 개념의 젠틀맨 드라이버는 꽤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유명 영화배우 폴 뉴먼처럼 많은 사람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특별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차 애호가였던 뉴먼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모터스포츠에 흥미를 느껴 오랫동안 경주에 직접 출전하며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기도 했고, 나중에는 자동차 경주 팀을 만들어 운영하기까지 했다. 그가 만든 뉴먼/하스 레이싱 팀은 그가 운영에 관여하는 동안 미국 CART 시리즈에서 여덟 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뉴먼과 같은 독특한 인물을 제외하면 흔치 않은 젠틀맨 드라이버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울프 바나토를 꼽을 수 있다. 영국 사업가로 권투, 수영, 테니스, 크리켓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던 바나토는 1920년대 들어 자동차 경주에 관심을 갖고 아마추어 레이서로 활동했다. 그는 1925년에 벤틀리 3L 모델을 사서 자동차 경주에 출전해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사교계에는 그와 비슷하게 벤틀리를 즐겨 타던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며 벤틀리로 경주에 출전한 사람들을 가리켜 ‘벤틀리 보이스(Bentley Boys)’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나토가 있었다.
영화배우 폴 뉴먼은 자동차 경주에 출전한 젠틀맨 드라이버로도 유명하다. Nissan North America 제공
영화배우 폴 뉴먼은 자동차 경주에 출전한 젠틀맨 드라이버로도 유명하다. Nissan North America 제공

한창 바나토가 벤틀리에 빠져 있을 무렵, 정작 벤틀리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벤틀리 창업자 월터 오언 벤틀리는 자신의 회사에 투자하면 마음껏 쓸 수 있는 차를 내주고 경주팀에 선수 자리를 마련하겠다며 그를 설득했다. 벤틀리의 제안은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1924년 벤틀리가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한 것을 본 바나토는 처음에 벤틀리가 요청한 것보다 더 큰 금액을 지원하며 지배지분을 확보하고 회장이 되었다. 이후로도 그는 매년 벤틀리에 적잖은 자금을 지원했다. 바나토의 지원에 힘입어 벤틀리는 새 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고, 벤틀리 보이스는 자신들의 차로 직접 르망 24시간 경주에 출전했다. 물론 바나토도 선수로 참여했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거둔 가운데 바나토는 세 차례 우승컵을 함께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젠틀맨 드라이버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그래서 그들이 젠틀맨 드라이버가 된 기분을 느껴볼 수 있는 모터스포츠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만들어져 인기를 얻고 있다. 여러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가 운영하고 있는 커스토머 레이싱(customer racing) 프로그램, 명품 브랜드가 후원하는 특별 GT 레이스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커스토머 레이싱 프로그램은 자동차 브랜드가 자사 차 소유자로 참가자격을 제한하는 아마추어 자동차 경주 대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프로그램마다 차이는 있지만 소비자가 일정한 비용을 내면 경주차의 준비에서 관리를 자동차 브랜드가 알아서 하고 소비자는 연습주행이나 경주가 열릴 때 경주장에 가서 자신의 차를 몰고 출전하면 된다. 특별 GT 레이스 시리즈 역시 비슷하게 운영되지만 정해진 규정에 맞는 여러 브랜드 차가 함께 출전해 서로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모두 적잖은 비용이 들지만 세계적으로 모터스포츠에 열정이 있고 경쟁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싶은 사람들의 참여가 꾸준히 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수는 과거 젠틀맨 드라이버들이 그랬듯 넉넉한 재력과 여유,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모두 갖춘 자동차 애호가들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젠틀맨 드라이버#벤틀리 보이스#모터스포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