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모던한 팝아트의 느낌? 재미있는 패션, 꿈같은 무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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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2015·2016 크루즈 쇼

(왼쪽부터) 한국 모델 수주, 어린이 모델 허드슨 크로닉,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이들은 샤넬 서울 크루즈 컬렉션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샤넬 제공
(왼쪽부터) 한국 모델 수주, 어린이 모델 허드슨 크로닉,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이들은 샤넬 서울 크루즈 컬렉션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샤넬 제공
4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분위기는 여느때와 달랐다. 샤넬의 2015·2016 크루즈 쇼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먼발치에서라도 열기를 느끼고자 입구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부 샤넬의 ‘팬’들은 샤넬 페이스북을 통해 ‘밖에서도 볼 수 있게 영상을 띄워줄 수 없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열기와 흥분은 이번 행사가 드물고, 경험하기 쉽지 않은 패션쇼라는 것의 방증이었다. 샤넬이 서울에서 글로벌 정기 컬렉션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크루즈 쇼는 주로 겨울에 따뜻한 여행지로 떠나는 여행객을 위한 패션을 선보이는 자리다. 샤넬은 2000년부터 매년 5월 프랑스 파리와 생트로페,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 부호(富豪)들의 여행지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열어 왔다. 지난해에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한 편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새로 썼다. 두바이 왕가가 소유한 인공 섬에서 하룻밤이면 사라져버릴 환상적인 건물을 세워 세계 언론인과 VIP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올해 샤넬의 여행지는 서울. 샤넬이 보낸 초청장에는 녹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땡땡이가 그려져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블랙 패션에 사뿐히 내려 앉은 한국 공예 장식(위), 오방색을 떠올리게 하는 핸드백(아래).
블랙 패션에 사뿐히 내려 앉은 한국 공예 장식(위), 오방색을 떠올리게 하는 핸드백(아래).
모던 팝…컬러풀(Colorful) 서울

오후 7시. 패션쇼장으로 들어가니 샤넬의 초청장에 왜 색색의 땡땡이가 그려져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이 두 달 전 서울 패션위크가 열렸던 그 장소인지 헷갈릴 정도로 딴 세상이 돼 있었다. 바닥과 천장, 벽은 눈부시게 하얗다. 초청장의 색색 땡땡이는 관객을 위한 동그란 의자가 됐다. 하얀 바탕 위라 색색 동그라미가 더욱 선명한 그림처럼 보였다. 쇼가 시작되기 전 행사장을 찾은 VIP들에게 물어보니 “일단 재밌어 보인다. 펀(Fun)한 이미지”라고 말했다. 팝 아트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오후 8시, 쇼가 시작됐다. 모델들은 가체를 썼고, 소매에는 오방색 색동이 들어갔다. 샤넬의 상징 동백꽃(카멜리아)은 자개 장식으로 아름답게 변했다. 프랑스 하이패션과 한복, 케이팝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에 관객들의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라거펠트는 패션쇼 무대와 옷, 액세서리, 메이크업, 음악으로 한국과 서울에 대한 그의 답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기자의 머릿속에는 ‘컬러풀(Colorful)’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채로움이 모든 요소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조각보의 패치워크는 좀더 원색적으로 변했고, 여름철 소재인 마(리넨)에 들어간 패치워크는 파스텔톤의 향연이었다. 조그마한 나전칠기 상자 같은 핸드백은 앙증맞았고, 모델의 쨍한 핑크빛 립스틱은 케이팝 아이돌 가수를 떠올리게 했다. 샤넬의 클래식백은 색동으로 물들여졌는데, 전통적이라기보다 모던함에 가깝게 느껴졌다.

라거펠트는 샤넬이 공개한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의 뿌리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것들이 오늘날 세계에 맞도록, 그리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샤넬과 같은 패션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적용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모던한 버전의 팝아트와도 같습니다. 제가 한국인들을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것들을 설명해 줍니다.”

샤넬 공방과 韓 전통공예의 만남

샤넬 하면 떠오르는 섬세한 자수 공방. 장인들의 ‘한 땀 한 땀’이 실현되는 공간이 있다. 이번 서울 크루즈 쇼에서는 샤넬의 섬세한 장인들과 한국의 전통공예 장인들이 서로 만난 것만 같았다. 라거펠트는 “한국의 자개 (공예)가 좋다”며 “한국인들이 검은 배경의 바탕 위에 자개를 수놓는 방식도 사랑한다. 그들만이 할 수 있는 한국스러움의 극치”라고 평했다.

첫 번째로 눈에 띄었던 것은 가체를 장식한 액세서리였다. 어떤 모델은 전통적인 조선 왕실의 여인처럼 가체를 썼고, 어떤 모델은 귀여운 ‘쿵푸소녀’처럼 머리 위에 공처럼 얹었다. 그리고 그 가체 위에는 나비, 꽃 모양의 자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조선시대 귀부인이 했을 법한 고급스러운 자개 장식이지만 색깔과 형태는 모던했다.

두 번째는 카멜리아의 변신.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카멜리아도 봤고, 샤넬 쇼핑백에 달려 있는 하얀색 카멜리아도 봤지만 이런 카멜리아는 처음이었다. 핑크색, 흰색, 하늘색, 자주색으로 장식된 샤넬의 서울 스타일 카멜리아는 이번 컬렉션에서 목걸이로, 옷 장식으로, 머리 장식으로 활용됐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고이고이 보관하던 아름다운 보석상자에 들어 있을 법한 액세서리 같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 옷으로 옮겨간 ‘나전 칠기’가 잊혀지질 않았다. 라거펠트가 말했던 검은 배경 바탕 위의 자개는 ‘나전칠기’를 떠올리게 한다. 옻칠한 목제품 위에 화려한 자개로 장식하는 공예. 한국 전통 장인정신의 극치로 불린다. 한국의 장인 정신이 샤넬 공방의 손끝을 만나니 아름다운 ‘블랙 나전 칠기’ 패션이 탄생했다. 자연 그대로의 색을 간직한 꽃잎 모양 자개가 반질반질하게 옻칠한 목공예 위에 올라와 있는 듯한 상의와 샤넬 장인이 솜씨를 발휘한 영롱한 자수 레이스의 스커트의 조합이라니.

실제로 고려, 조선시대의 전통 나전칠기는 유럽 경매 시장에서 고가(高價)에 거래된다고 한다. 마침 호림박물관에서 6월 말까지 진행 중인 나전칠기 전시회, ‘조선의 나전-오색찬란’에 들르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왼쪽)‘깜봉’ ‘샤넬’ ‘서울’이 한글로 적혀진 블랙 재킷을 입은 모델. (가운데)차례를 기다리는 모델들 가운데 색동 저고리를 떠올리게 하는 볼륨감있는 소매가 눈에 띈다. (오른쪽)색동의 다채로운 색깔을 활용한 샤넬의 핸드백.
(왼쪽)‘깜봉’ ‘샤넬’ ‘서울’이 한글로 적혀진 블랙 재킷을 입은 모델. (가운데)차례를 기다리는 모델들 가운데 색동 저고리를 떠올리게 하는 볼륨감있는 소매가 눈에 띈다. (오른쪽)색동의 다채로운 색깔을 활용한 샤넬의 핸드백.
파리 깜봉 매장의 한복을 상상한다

“저는 항상 한국 전통의상의 아이디어를 좋아했습니다. 샤넬에는 저를 도와 모든 소재를 총괄하는 한국인 디렉터가 있습니다. 일부 소재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 이곳(한국)에서 직접 제작했습니다.”

라거펠트가 언급한 한국인 디렉터는 김영성 씨다. 부산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김 씨는 1998년 샤넬 본사에 입사한 뒤로 17년째 샤넬의 원단과 소재를 담당해 왔다. 기자는 2006년 김 디렉터의 가족으로부터 e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김 디렉터가 한국의 전통이 담긴 고급 원단을 찾아 샤넬에 소개하고 싶어하지만 한국의 원단시장 상황이 좋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걸까. 9년 후 라거펠트와 함께 내놓은 가장 한국적인 샤넬의 컬렉션에는 한복을 떠올리게 하는 하늘하늘한 소재들이 많이 쓰였다. 섄텅(shantung·가공하지 않은 실크의 일종으로 가브리엘 샤넬이 즐겨 사용한 소재), 리넨, 오간자, 튤, 레이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실루엣과 비율, 패치워크 역시 한복과 조각보를 떠올리게 했다. 소매가 넓고 어깨 부분이 둥근 형태의 재킷도 있었다. 라거펠트는 전통 한복의 칼라를 감쪽같이 숨겨 목선을 훤히 드러내게 하는 새로운 룩을 표현해냈다. 바지는 통이 넓으면서 짧게 재단하거나 단 부분을 타이트하게 재단했고, 스커트는 펜슬형이나 일자형으로, 길이는 무릎 바로 밑까지 오도록 했다. 이브닝드레스는 하이 웨이스트 라인으로 가벼우면서도 볼륨감 있게 표현해 한복의 비율을 가져 왔다. 일부 파스텔톤 패치워크 드레스는 서울 인사동 어딘가에서 마주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 한국적이었다.

올겨울이 되면 서울 크루즈 쇼에서 선보인 컬렉션이 세계 샤넬 부티크에 걸릴 것이다. 샤넬의 1호점 프랑스 파리 깜봉 매장에서 ‘한복에 빠진 샤넬’을 마주친다면. 이미 외신들은 샤넬 크루즈 쇼를 소개하며 한복(hanbok)을 언급했다. 세계적인 샤넬의 VIP들, 안목 높은 부호(富豪)들이 매장에서 이를 마주했을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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