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짓밟힌 소수자들의 삶에서 길어올린 ‘詩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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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김정아 지음/248쪽·1만2000원·클

 신문을 읽는 것인지 소설을 읽는 것인지 헷갈리는, 소설 같은 현실을 마주하는 요즘이다. 현실을 드러내는 걸 목표로 하는 소설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책은 가난, 파업, 철거, 비정규직 등을 소재로 한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집이다. 주인공은 술에 의존해 살아가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10대 소녀(‘몽골 낙타’), 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곡우’)를 비롯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그러나 1980년대 리얼리즘 소설 같은 작위적인 느낌은 한결 덜하다.

 표제작을 보자. 노조 활동가인 내가 사는 연립주택 지하에 윤미희라는 여성이 세를 든다. 가난, 억울한 징역살이 등으로 짓밟힌 삶을 살아온 이다. 옛날 스타일이라면 ‘절벽에서 떨어진, 가시덩굴에 떨어져 온몸에 가시가 박힌’ 윤미희와 내가 연대해 투쟁의 대열에 서는 과정을 그렸을 법하지만 외려 윤미희는 ‘민폐 캐릭터’다. 나는 윤미희와의 인연을 끝내고 싶다. 마지막 이미지가 다소 식상한 느낌도 주지만 대체로 이념 과잉이나 ‘정신 승리’의 자세 같은 건 소설에 없다.

 회사 측의 집회금지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날 아이들의 급식당번이라는 걸 잊었다가 유인물을 돌리며 알게 된 교회 전도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노조 지회장(‘가시’), 시장의 국수 가게를 반쯤 철거당했으면서도 철거 용역들에게 밤참을 파는 노인(‘마지막 손님’) 등 디테일한 캐릭터는 작가의 이력에서 나왔다.

 저자는 1997년부터 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했다고 한다. 내용을 보면 저자가 20년 가까이 소설을 써 온 듯한데, 이번이 첫 소설집이다. 2편은 문예지 ‘리얼리스트’에, 1편은 8년 전 인터넷 매체에 실렸지만 나머지 5편은 처음 발표하는 작품이다.

 이성혁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우리 사회가 배제해버린 소수자의 삶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그 삶에 내재해 있는 ‘시적인 것’을 끌어올린다”고 했다. 1980년대와 유사한 소재의 소설이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의 현실을 바탕으로 쓰이고, 또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가시#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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