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독자서평]‘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일깨운 우리의 본능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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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와 함께하는 독자서평]
◇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 지음/김세미 이승수 옮김/92쪽·9000원/바다출판사

※지난 일주일 동안 336편의 독자 서평이 투고됐습니다. 이 중 한 편을 선정해 싣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놀랄 때가 있다. ‘허무함’과 ‘덧없음’을 마주할 때다.

 보통의 필경사를 기대했던 ‘나’의 바람과 무관하게 바틀비는 필사 외의 업무를 거부한다.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거다. 신중한 ‘나’는 바틀비를 당장 해고하진 않는다. 하지만 바틀비는 점점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늘어간다. ‘나’는 결국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바틀비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모비딕’ 속 에이해브의 광기에 찬 복수와 비극적 운명과도 닮아 있는 바틀비에게는 ‘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이 공존한다. 결말에서 바틀비의 이력을 알려줄 때까지 왜 바틀비가 필사 외 업무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 고집스러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는 알아차리게 된다. 바틀비가 말하는 ‘싶은’이라는 표현이 갖는 마력이다. 평생을 필사로 먹고살아온 60대 동료 필경사 터키가 쓴 ‘싶다’는 단어를 ‘나’가 짚어내는 순간, 바틀비처럼 그 역시 내면에서 이끄는 대로 하고픈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깨닫는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마음속에 숨겨진 소망의 본능을 일깨웠다는 사실은 사뭇 놀라웠다. 터키도,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도, 화자인 ‘나’조차도 바틀비의 태도에 끌린다.

 하지만 바틀비의 이야기는 허무하고 덧없다. 그는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아 버렸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말과 행동이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른 사람들도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을 소유한 바틀비. 나도 가끔 바틀비처럼 말하고 싶어질 것 같다. “아니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동민 서울 구로구 구로동
#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모비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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