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그림은 시선의 결과물… 그렇기에 흥미롭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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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역사/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 퍼드 지음·민윤정 옮김/360쪽·3만8000원·미진사

표지만 언뜻 보고는 어린이용 미술 관련 서적인가 했다. 아마존에서 영국판 원서 표지를 찾아보니 파란색 배경에 폰트디자인을 강조한 디자인이 딱히 한국어판보다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번역본 편집디자이너의 고민이 상당했을 듯하다.

내용을 몇 장 넘겨보니 어린이용은커녕 관점이 진지하고 문장은 담백하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와 미술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의 대담 형식. 대담문은 이야기가 종종 길을 잃어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책은 그런 함정을 잘 피해간다. 편집자의 솜씨 덕도 있겠지만 두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뚜렷하게 일치하는 까닭이 더 크다.

에드가르 드가의 유채화 ‘폴린 드 메테르니히’(1865년)는 앙드레 아돌프 외젠 디스데리가 1860년 촬영한 명함판 사진(아래)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사진보다 사실적인 운동감을 표현했다. 미진사 제공
에드가르 드가의 유채화 ‘폴린 드 메테르니히’(1865년)는 앙드레 아돌프 외젠 디스데리가 1860년 촬영한 명함판 사진(아래)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사진보다 사실적인 운동감을 표현했다. 미진사 제공
호크니는 서론에서 책의 제목이 ‘미술(art)의 역사’가 아님을 확인시킨다.

“무엇이 미술인가? 나는 모르겠다. 자신이 미술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미술을 한다고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미술’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림(picture)의 역사’다.”

게이퍼드의 말대로 그림의 본질은 2차원 평면 위에서 3차원을 재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호크니는 “자연 세계에 사실 2차원의 존재라는 건 없으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림은 추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3차원 세계를 2차원에 요약한 대표적 시도인 ‘지도’ 얘기부터 시작해 시대 순으로 회화, 사진, 영화를 짚는다. 시대별 소재에 대한 얽매임은 없다. 월트디즈니의 ‘피노키오’(1940년) 애니메이션 한 시퀀스를 19세기 일본 목판화와 비교하는 식이다. 숱한 미술사 책에 당연한 듯 거듭 등장하는 유명 작품에 대한 엇비슷한 설명을 다시 만나야 하는 경우가 비교적 적어 지루함이 덜하다.

첫 도판은 피카소가 1952년 그린 유채화 ‘부엉이’다. 수많은 보조 작가를 공장 근로자처럼 채용해 부리는 대량생산 현대미술 작가들을 드러내놓고 비판해 온 호크니는 이 그림에 붙은 문장에서 요즘 제일 잘나가는 후배 한 명을 은근히 꼬집는다.

“현대의 작가는 실제 부엉이를 잡아다가 배를 가르고 속을 채운 박제로 만들어 케이스 안에 집어넣어 버릴 거다. 피카소의 부엉이는 한 인간이 자신의 시각으로 부엉이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결과물이다. 나는 그쪽이 박제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그가 언급한 ‘현대의 작가’는 분명 데이미언 허스트다. 어느 쪽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들의 대화에는 ‘더 강한 자극’에 골몰하는 현대미술이 놓치고 있는 가치에 대한 안타까움이 옅게 배어 있다.

“드로잉의 ‘자국’은 동세(動勢·movement)다. 선은 속도감을 담고 있다. 드로잉은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자국 없는 드로잉은 그렇지 못하다. 종이 위에 그린 선 몇 개만으로 거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의 경제성이 드로잉의 미덕이다. 간소할수록 감동을 준다. 심지어 평소에 과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도.”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그림의 역사#데이비드 호크니#마틴 게이 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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