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전사의 조건: 예쁘고 섹시할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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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걸 굿 걸/수전 J 더글러스 지음·이은경 옮김/580쪽·2만3000원·글항아리

영화 ‘어벤져스’에서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 역을 맡은 건 섹시 스타 스칼릿 조핸슨이었다. 사진 출처 ‘어벤져스’ 홍보용 스틸
영화 ‘어벤져스’에서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 역을 맡은 건 섹시 스타 스칼릿 조핸슨이었다. 사진 출처 ‘어벤져스’ 홍보용 스틸
여성학자가 쓴 페미니즘 책이다. “여성 대통령 시대에 페미니즘 책이라니!” 혀를 차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페미니즘은 진부하고 낡은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페미니스트에겐 제 권리만 외치는 깐깐하고 피곤한 여자라는 이미지도 덧씌워져 있다. 온라인에 성 평등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꼴페미’ ‘페미충’ 같은 욕이 댓글로 달린다.

고위직 여성이 뉴스에 매일 등장하고, 알파 걸이 베타 보이들을 위협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가 반문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현재 한국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3% 정도에 불과하다. 역대 최다라지만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지역구 여성 의원은 10명 중 한 명 정도며, 여성 관리직 역시 10명 중 한 명 정도다. 반면, 강력 범죄 피해자 10명 중 8명 이상이 여성이다(여성정책연구원 성인지 통계). 굳이 통계를 대지 않더라도 60대인 대통령부터 평범한 10대 소녀까지 대부분의 여성은 능력 못지않게 외모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 책은 성차별을 ‘과거의 일’처럼 여기며 여성들이 오히려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이 시대의 ‘진화된 성차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중매체는 힘 있고 스스럼없는 여성을 부각시켰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들은 자유롭게 성을 이야기하고, 그룹 ‘스파이스 걸스’는 ‘걸 파워’를 외쳤으며 ‘헝거게임’의 캣니스는 강인한 전사로 표현된다. (위 사진 부터).
1990년대 이후 대중매체는 힘 있고 스스럼없는 여성을 부각시켰다.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들은 자유롭게 성을 이야기하고, 그룹 ‘스파이스 걸스’는 ‘걸 파워’를 외쳤으며 ‘헝거게임’의 캣니스는 강인한 전사로 표현된다. (위 사진 부터).
“TV에서 보는 고위직 여성의 모습은 남성이 장악한 전문직 세계에서 여성의 정복한 정도를 과장되게 그려낸다. … 이런 현실 도피적인 이미지들은 연봉이 트럭 한 대 값밖에 되지 않는 현실 속의 무수한 여성들의 처지를 가려 버린다.”

저자는 특히 대중매체에 주목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 텔레비전과 영화, 잡지를 꼼꼼히 살폈다. 이 시대에 ‘여자는 무엇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그 대신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그럴 능력이 있지만 어쨌듯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메시지가 통용된다. 영화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나 ‘미녀 삼총사’의 주인공 같은 ‘T팬티를 입은 여전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실제로 21세기 소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 크기와 몸무게에 사활을 건다.

“T팬티를 입은 여전사들은 여성들이야말로 힘과 공격성을 여성성 및 섹슈얼리티와 결합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다른 한편으로 여전사들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다시 한 번 굳건히 했고, 여성이란 도자기 같은 피부에 가슴이 풍만하고 날씬해야만 여느 남성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진화된 성차별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발견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 유세 중 눈물을 보인 것을 두고 남성 평론가들은 “표를 얻기 위한 어설픈 계략”이라고 비난했다. 여성 앵커 케이티 커릭이 CBS의 간판 저녁 뉴스 앵커로 발탁되자 사람들은 “아침 프로그램 출신이라 ‘진지함’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다른 아침 프로 출신 남성 앵커들에겐 드문 비판이었다.

저자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 같은 드라마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지적부터 셀러브리티 매체가 여자 스타에게 출산과 양육을 강요한다는 비판까지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혹자는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빈다’며 불편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된 성차별에 보호막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건 모두 농담이야’라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여전히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배드 걸 굿 걸#수전 j 더글러스#어벤져스#블랙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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