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순도 100%의 악인… 그의 뻔뻔한 매력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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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정유정 지음/384쪽·1만3000원/은행나무

“악이 인간 내면에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정유정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악이 인간 내면에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정유정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일주일간의 예약 판매만으로 인터넷서점 알라딘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한국문학으론 처음이다. 그만큼 기다린 독자가 많다는 얘기다. 정유정 씨의 장편 ‘종의 기원’, 3년 만의 신작이다. 전작 ‘7년의 밤’이 40만 부, ‘28’이 20만 부가 나가면서 정 씨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새 소설이 사이코패스의 탄생기라는 건 일찌감치 알려졌다. 배경은 간척지의 신도시 아파트다. 등단작 ‘내 심장을 쏴라’ 이후 오랜만에 작가는 1인칭 화자를 내세웠다. 그런데 화자 ‘나’가 이상하다. 대부분의 1인칭 화자들은 독자가 읽어 나가면서 ‘나’가 되는 것처럼 공감을 끌어내는데, ‘종의 기원’의 ‘나’는 다르다. 그는 순도 100%의 악인이다.

소설은 화자 유진이 피 냄새에 잠에서 깨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가 먼저 본 것은 피투성이인 자신의 모습, 그 다음엔 죽어 있는 어머니다. 범인은 유진인 걸까? 모함에 빠진 게 아니냐는 상투적인 추측이 들 법한 상황에서 작가는 유진의 내면을 파고든다. 열 살 때 눈앞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고 어머니와 살아온 지 16년째. 정신과 의사인 이모가 처방해 주는 약에 의지해 왔다. 한때 수영선수였던 유진은 몰래 약을 끊었다가 경기 중 발작을 일으킨 뒤 수영을 접어야 했다. 작가는 어머니가 남긴 일기와 유진의 기억을 교차시킨다. ‘나’, 유진이 돌아보는 자신의 충격적인 행동은 충분히 그럴 만한 것이지만, 어머니의 기록은 다르다.

무감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소설 ‘종의 기원’에는 죄책감 없이 잇달아 살인을 저지르는 ‘순수 악인’이 등장한다. 동아일보DB
무감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소설 ‘종의 기원’에는 죄책감 없이 잇달아 살인을 저지르는 ‘순수 악인’이 등장한다. 동아일보DB
‘7년의 밤’이나 ‘28’에서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았던 작가는 이번엔 아파트라는 협소한 공간으로 무대를 좁혔다. 공간을 한정한 대신 유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었다. 동작보다는 심리 묘사가 많지만 빠르게 읽힌다. 사람을 죽이거나 폭력을 가하는 장면은 망설임 없이 잔혹하게 그려진다. 작가가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이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정유정표 이야기의 힘도 여전하다. 범죄심리학, 뇌과학, 진화심리학 관련 서적을 수십 권 읽고 프로파일러와 정신과 교수를 찾아가 취재한 노력이 탄탄한 서사에서 드러난다.

스스로를 옹호하는 유진의 모습은,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매력이 있다. ‘주인공이 매력이 있어야 독자가 책을 끝까지 읽는다’는 작가의 신념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를 옹호하는 걸까. 때마침 현실에서도 토막살인, 부친 살해 등 참혹한 사건들이 잇달아 보도되면서 작품도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정 씨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백신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는 “악인의 속이 어떤지 평범한 사람들은 잘 모르지 않느냐. 통찰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종의 기원#정유정#싸이코패스 탄생기#추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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