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트라우마, 과거에 갇힌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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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제효영 옮김/660쪽·2만2000원·을유문화사
정신의학과 교수가 밝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고통
전쟁·테러·사고로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心身을 지배하며
제어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
트라우마 극복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사회 안전망 구축해야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던 당시와 비슷한 냄새나 소리, 촉감만 접해도 공포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학생들을기리는 ‘기억교실’(위)과 수요집회에 나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아래 왼쪽). 학대받은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이 매섭다. 동아일보DB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던 당시와 비슷한 냄새나 소리, 촉감만 접해도 공포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학생들을
기리는 ‘기억교실’(위)과 수요집회에 나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아래 왼쪽). 학대받은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이 매섭다. 동아일보DB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 기적임을 안다는 건 깊은 고통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보스턴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인 저자(73)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의 권위자로, 트라우마가 인간을 얼마나 잔인하게 삼켜버리는지 30여 년간의 진료 경험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그가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보스턴 보훈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톰을 만나면서부터다. 톰은 정찰을 나갔다 기관총 공격으로 동료들이 순식간에 숨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발이 허공에 붕 뜬 채 논에 얼굴을 박고 있는 이는 유일한 진짜 친구 알렉스였다. 변호사로 성공했지만 톰은 베트남 밀림을 연상시키는 무성한 나무, 불꽃놀이만 봐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분노에 휩싸였다.

9·11테러, 전쟁, 교통사고뿐 아니라 성장기에 받은 고통은 고스란히 각인돼 정신을 분열시키고 신체 감각까지 무너뜨린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남자의 몸이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또 다른 여성은 다리의 감각을 못 느낀다. 그는 미소 띤 엄마에게서 “너는 실수로 건네준 남의 아이 같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신부에게 성추행당했던 남성은 여자친구가 장난스럽게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자 자기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며 악을 쓴다. 트라우마가 삶의 시계를 고통의 순간에 멈춰버리게 만든 것이다.

과거에 갇힌 이들이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 저자는 오랜 시간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원인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의사들이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에만 주목해 약을 처방하는 것과 달랐다. 폭력적이거나 과잉행동장애를 지닌 아이, 비만, 거식증, 일중독에 빠진 어른에게서도 트라우마를 찾아낸다.

약물치료는 기본이고 서구 의학계에서 터부시되는 지압, 명상, 요가는 물론 일본 무술 가라테까지 활용하는 저자의 노력은 사람을 치료하는 이의 자세에 대한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저자의 개인사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른 아침 조용히 계단을 내려와 성경을 읽던 아버지는 종종 느닷없이 분노를 폭발해 가족들을 기겁하게 했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다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아픔이 있었다. 저자 역시 트라우마 클리닉이 갑자기 폐쇄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철저한 무력감이 어떤 건지 실감한다.

이 글은 단순한 임상 보고에 그치지 않는다.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트라우마로 신음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음을 구조적으로 짚어낸다. 치료비 지원 예산을 늘리기보다 어린이가 그늘 없이 자랄 수 있는 가정과 학교,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불안한 어른은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수 없다. 사회 안전망이 탄탄한 노르웨이의 범죄 발생률이 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고, 의료비용은 절반에 그치는 현실은 이를 증명한다. 안타깝고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환자들의 인생사는 행동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어처구니없는 사고들로 수시로 집단 트라우마에 빠지고, 끔찍한 학대 속에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눈여겨봐야 할 책이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는 건 우리의 몫이다. 원제는 ‘The body keeps the score’.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트라우마#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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