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위대한 영혼의 흔적이 쌓인 런던 거리를 걷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송정임 김종관 지음/344쪽·1만5000원/뿌리와이파리

무명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남편과 미대 졸업생 아내는 2002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살았다. 이들은 멋진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느 날 그들은 런던 거리 한 건물에 붙어있는 한 블루 플라크(Blue Plaque)를 발견했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곳이었다. 블루 플라크는 런던에 살았던 유명인의 집이나 작업 공간을 알려주는 일종의 문패다. 이때부터 이 부부의 블루 플라크 탐방이 시작됐다. 런던에 880곳인 블루 플라크 중 이들이 직접 가본 23곳을 책에 담았다. 이 표지는 죽은 지 20년,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났으며 인류의 복지와 행복에 탁월하게 기여한 인물의 거주지 등에 붙인다. 대상은 영국 문화유산 단체인 잉글리시 헤리티지 소속 사학자들의 조사와 심사위원 9명의 심사를 거쳐 선정된다. 1998년 시작돼 2005년 종료됐다.

이 책의 블루 플라크를 따라가 보는 런던 거리는 여느 안내서와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1830년대까지 왕실만 사용할 수 있었던 킹스로드는 1960년대 레코드 레이블과 트렌디한 가게가 들어서며 패션의 중심지가 됐다. 레드 제플린이 소유했던 ‘스완 송 레코드’ 본부가 있었고 그룹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가 운영했던 숍 ‘섹스(SEX)’가 있었다.

이런 사실도 런던 마니아 정도나 알 수 있는 거리 풍경이지만 이 책은 비비언 리, 모차르트, 조지 엘리엇, 오스카 와일드, 브램 스토커, 제인 오스틴, 애거사 크리스티의 집이 킹스로드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사랑했던 여인이 결국 와일드의 친구였던 브램 스토커에게 마음을 빼앗긴 얘기까지 덧붙이면 킹스로드는 전혀 다른 거리로 느껴진다.

부인 송정임 씨가 블루 플라크 건물과 인근 풍경을 그린 그림은 사진처럼 명료하진 않지만 따뜻하고 잔잔해 책의 느낌을 잘 살려준다.

이 부부는 위대한 사람들의 집을 보면서 뭘 느꼈을까. 멋진 인생을 꿈꿨던 부부는 위대한 사람들조차 멋지게 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대신 자신들의 인생이 멋지지 않다고 깎아내리는 것도 그만뒀다.

참고로 베이커 가 221b 셜록 홈스 박물관에도 블루 플라크가 붙어있다. 소설 속에서 홈스의 집으로 나온 곳.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워낙 유명한 주인공이니 특별히 블루 플라크를 붙여준 것일까. 아니다. 원칙 하면 영국 아닌가. 가짜 블루 플라크다. 인근 어퍼윔폴 가의 아서 코넌 도일 집에 붙은 블루 플라크를 보며 위안을 삼기를.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블루 플라크 스물세 번의 노크#블루 플라크#버지니아 울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