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수용소 밖 멋진 산…“어이, 탈출해 등산 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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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포로원정대/펠리체 베누치 지음/윤석영 옮김/424쪽·1만2500원·박하

포로수용소의 철조망 새로 보이는 케냐 산(왼쪽), 바위와 암벽 가운데 자리 잡은 호수. 저자 펠리체 베누치가 직접 그렸다. 박하 제공
포로수용소의 철조망 새로 보이는 케냐 산(왼쪽), 바위와 암벽 가운데 자리 잡은 호수. 저자 펠리체 베누치가 직접 그렸다. 박하 제공
“여기서 탈출해서 저 산에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없어?”

미친 짓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푸른 빛 빙하를 두른 5200m 높이의 산을 문득 봤을 때 말이다. 여기서 나가 저 산을 오르자, 그러고 다시 돌아오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산을 오르려면 일단 포로수용소를 탈출해야 한다는 것, 운 좋게 무사히 탈출한다 해도 수용소 밖은 맹수들이 우글대는 아프리카라는 것. 산악 장비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든지, 식량을 준비해야 한다든지 하는 건 ‘사소한’ 과제다. 이 모험에 아이디어를 낸 저자와 동참하겠다는 동료가 둘 더해졌다. ‘미친 포로원정대’가 꾸려진 것이다.

이 책은 실제 상황이다. 저자는 이탈리아 식민지청 공무원으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로 파견됐다 1941년 연합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영국령 케냐 제354포로수용소의 전쟁포로가 됐다. 단조로운 수용소 생활을 이어가던 저자의 눈앞에 우기를 마친 케냐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삘’이 왔다. 이건 꼭 가야 해, 라는. ‘미친 포로원정대’의 케냐 산 등반기가 펼쳐진 순간이다.

‘쇼생크 탈출’ 같은 비장한 탈출기, ‘반지의 제왕’ 같은 격렬한 모험기를 예상했다면, 그런 기대는 즐겁게 접는 게 좋다. 이 책은 ‘코미디’다. 몇 달에 걸쳐 복제한 열쇠로 수용소 출입문을 열었다. 수십 발의 총알이 날아올 위험을 무릅쓰고 평원을 지난다. 군부대 차량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심코 도로에 올랐다가 동료들한테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었다. 고생은 이제 시작이다. 표범과 사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산길을 걷는다. 200m 앞에서 코뿔소를 발견하곤 그 코를 피하겠다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산을 오르다 풀밭이 나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케냐의 풀밭은 양탄자처럼 고른 게 아니라 풀이 무릎 높이까지 거칠게 자란 모양새다. 빗물이 발목까지 빠지는 도랑을 만들어서 흐르고 있다. 걸음을 잘못 뗐다간 발목을 삘 수도 있는 지경이니, 풀밭 지나가기가 여간 고생이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이 힘겨운 등산을 놀랍도록 코믹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사실 매순간 생명이 위협받는 무서운 상황인데, 작가의 묘사는 유머가 넘친다. 우연히 마주친 짐승이 덤비는 대신 떠나버린 걸 보고 “우리가 수준 이하의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나 보다”라고 떠든다든지, ‘검은 이빨’로 불리는 바위에 다다라선 앞선 등산인의 표시가 없는 걸 확인하고 ‘혹시 우리는 케냐 산 북벽의 이 외진 곳에 도달한 최초의 인류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든지 하는 부분이 그렇다. 분명 힘든데 유쾌한 기록을 통해 작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머의 힘을 보여준다.

70여 년 전 기록이지만 수용소의 포로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와 닿을 법하다. 꿈을 위해 미친 모험을 해보라는.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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