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선 후기 ‘CSI 요원 보고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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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세기초 범죄 사례 담긴 ‘일성록’ 토대로 당시 사회상 분석
◇민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유승희 지음/285쪽·1만7000원·이학사

조선 후기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긍재 김득신(1754∼1822)의 ‘밀희투전(密戱鬪+)’.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에 인물, 
짐승 등으로 끗수를 나타내는 도박놀이다. 조선 후기 사회풍속 범죄로 취급해 금지됐지만 많은 사람이 몰래 즐겼다. 이학사 제공
조선 후기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긍재 김득신(1754∼1822)의 ‘밀희투전(密戱鬪+)’. 투전은 길고 두꺼운 종이에 인물, 짐승 등으로 끗수를 나타내는 도박놀이다. 조선 후기 사회풍속 범죄로 취급해 금지됐지만 많은 사람이 몰래 즐겼다. 이학사 제공
요즘 수목드라마 ‘조선 총잡이’가 화제다. 조선 후기 ‘총잡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오션스 일레븐’처럼 전문 위조 사기단도 있었다.

1777년(정조 1년) 한성. 이똥이, 이똥개, 김치학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각각 기후관측을 하는 ‘관상감의 장인’, 나무와 돌을 조각하는 ‘각수장’, 물시계(자격루)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남의 곡식을 몰래 훔친 것이 들통 나 돈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관문서를 위조해 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진짜 공문서를 구해 나무 조각에 공문서 도장인 어보(御寶)를 오려 붙인 후 그 모양대로 파서 가짜 도장을 만든 것.

이 책은 “옛날에도 전문 위조범죄가 있었다”라는 단순한 흥미 위주의 소개에만 그치지 않는다. 역사학과 도시인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범죄’야말로 시대상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강조한다. 1752년(영조 28년)에서 1910년까지의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을 토대로 살인, 강도, 폭행, 절도, 방화 등 당시 범죄를 통해 사회상을 분석한다.

각종 통계를 통해 조선 후기 범죄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저자가 당시 범죄 2853건을 분석한 결과 2539건(89%)이 폭력 범죄였다. 경제 범죄는 170건(6%), 사회 풍속은 144건(5%)이다. 경제 범죄는 전체 범죄의 6%에 불과하지만 이 중 72.4%가 한성부에서 발생했다. 경제 범죄 중 50% 이상이 위조범이었다. 주로 위조된 문서는 추증첩(追贈帖·죽은 후 관위를 내리는 문서), 홍패(紅牌·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증서) 등이었다. 모두 신분과 관련된 문서다.

저자의 해석은 이렇다. 위조 사범이 증가한 근본 원인은 16세기 이래 특권층이 토지 점유를 확장했기 때문. 이에 농민들은 농토를 잃고 도시로 떠났고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은 한성부 민가에 거주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한성부 내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했지만 당시 도성 내에는 경작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농민들이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 신분별로 양반 범죄는 3.2%, 양인, 노비 범죄가 85.1%에 이른다.

또 ‘일성록’이 마치 CSI(Crime Scene Investigation·과학수사대) 요원 보고서처럼 정교하다는 점도 책의 재미를 더한다. 사건 개요는 물론이고 범인의 증언, 주변인의 반응, 범행수법과 장소, 시신의 위치와 상태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다.

“1797년 한성부 죄인 김동득 살인 사건 피해자를 보면 안면이 편편하고 양 입술은 오므려져 있어 마치 까마귀가 쫀 듯하다. 이마에는 길이 2촌 7푼, 너비 9푼, 깊이 5푼의 상처가 있다. 만져보고 눌러보니 이마와 눈썹 사이를 돌로 때린 것으로 분석된다.”

일성록의 한 대목이다. 조선 후기 범죄 경향을 보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란 생각이 든다. 다만, 옛날이 더 좋았다면 사이코패스 같은 ‘묻지 마’ 범죄는 없던 시절이기 때문일까.
        
▼ 연쇄살인범-성범죄자들 다룬 실화 연달아 나와 ▼


‘먹고살기 위해’ 저질러진 과거의 범죄와 달리 요즘 범죄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사회에 대한 분노’나 ‘사이코패스적 쾌락과 자아실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현대의 범죄는 섬뜩하다 못해 치를 떨 만큼 두렵다. 출판계가 범죄 관련 책이 더위 해소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연쇄살인 성폭력 등 강력범들을 다룬 책이 이번 주 한꺼번에 출간됐다.

‘그 남자, 좋은 간호사’(찰스 그래버·골든타임)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알려진 미국인 찰스 컬렌의 이야기다. 찰스 컬렌은 16년간 미국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 주 요양원, 의료시설 등 총 9곳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환자에게 링거를 통해 극약을 주사하는 방식으로 40여 명을 살해한 인물이다. 저자는 10년에 걸친 경찰, 병원, 교도소 취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 이를 소설 형태로 완성했다. 찰스 컬렌의 범죄 과정뿐 아니라 그의 범죄가 세상에 오랜 기간 드러나지 않은 이유로 병원들의 이기주의와 은폐 성향을 지목했다.

‘괴물이 된 사람들’(이후)은 미국 교정시설에 수감된 9명의 아동 성범죄자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저자인 패멀라 D 슐츠 미국 앨프리드대 교수 역시 어린 시절 이웃에게 성학대 피해를 겪었다고 한다. 저자는 어떻게 자신이 성학대의 피해자가 됐는지와, 성학대 가해자의 실체 및 범행 배경 등을 담담하게 분석함으로써 아동 성학대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한다.

‘한국의 연쇄 살인범 X파일’(양원보·휴먼앤북스)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살인범을 다룬 책이다. 이들이 범죄를 벌이게 된 원인과 과정, 범행 후 이야기를 상세히 담아냈다. 잔혹한 연쇄살인범의 실태를 통해 사회의 안전과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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