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까막눈 소녀, 세상을 비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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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풍자로 인간사회 조롱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요나스 요나손 지음·임호경 옮김/544쪽·1만4800원·열린책들

똘똘한 흑인 소녀 놈베코의 여정을 펼쳐 보이는 그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저 그림 하나하나가 키워드가 되는 각 에피소드가 금세 떠오를 것이다. 가운데 문장은 소설의 스웨덴어 원제.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와 같은 뜻이다. 열린책들 제공
똘똘한 흑인 소녀 놈베코의 여정을 펼쳐 보이는 그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저 그림 하나하나가 키워드가 되는 각 에피소드가 금세 떠오를 것이다. 가운데 문장은 소설의 스웨덴어 원제.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와 같은 뜻이다. 열린책들 제공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라니. 이 역설적인 제목이 소설의 정체를 대변한다. 첫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스웨덴의 요나스 요나손(53)은 두 번째 소설에서 허울 좋은 이 세상과 허다한 바보들을 유쾌하게 조롱한다.

주인공 놈베코는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 차별 정책) 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웨토의 빈민촌에 사는 열네 살 흑인 소녀다. 최연소 공동변소 관리소장이 된 놈베코는 지역별 인구 대비 적정 변기 수를 계산해내는 영민함을 타고났다. 호색한이지만 문학애호가인 옆집 아저씨에게 글을 배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여 똑똑하게 말하는 법을 터득한다. 하지만 지배계층인 백인들에게 피부색이 까만 이들은 그저 ‘까막눈이’일 뿐이다.

우연히 스무 개가 넘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은 놈베코는 용기를 내 빈민촌을 탈출하고, 복잡한 사정 끝에 핵폭탄을 개발하는 비밀 연구소의 청소부가 된다. 연구소를 이끄는 엔지니어는 사실은 실력이라고는 없지만 아버지의 권력과 부로 남아공 최고 핵 전문가가 된 인물. 간단한 수식조차 모르는 술고래 엔지니어 뒤에서 독학으로 핵물리학을 익힌 놈베코는 그림자 조력자로 활약한다.

엔지니어의 부실한 관리로, 반경 58km 내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3메가톤급 핵폭탄 하나가 주문량을 초과해 생산된다.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핵폭탄을 손에 넣으려는 가운데, 놈베코는 정치 망명자로 가장해 스웨덴에 발을 디딘다. 어쩌다가 놈베코가 스웨덴으로 잘못 배달된 이 핵폭탄을 떠안으면서 아슬아슬하고 기막힌 모험이 시작된다. 공식 서류상으로는 한 사람인 쌍둥이 형제, 이 형제를 스웨덴 왕가를 없앨 목적으로 키우는 강박증적인 아버지, 베트남전 참전 후 미국중앙정보국(CIA)의 망령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 감자 농사를 짓는 자칭 백작부인, 닭 목을 비틀고 농기계를 수리할 줄 아는 스웨덴 국왕이 놈베코의 여정에 가세한다. 스웨덴 왕과 총리가 핵폭탄을 실은 감자 트럭에 감금되는, 확률이 457억6621만분의 1(놈베코의 계산)인 일이 벌어진다.

놈베코를 중심에 둔 서사를 탄탄하게 받치는 배경은 남아공과 스웨덴의 현대사다. 남아공은 1980년대 말까지 여섯 기의 핵무기를 개발했다가 1994년 이를 모두 해체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이스라엘은 남아공을 지지했고, 넬슨 만델라는 2008년에도 조지 W 부시 정부의 테러리스트 감시 명단과 여행 제한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현대사의 뼈대 사이를 구석구석 치밀하게 채우는 이야기의 힘, 위트 넘치는 은유와 풍자는 어리석은 인간 사회를, 인종 차별적 편견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비웃는다. 예측 가능한 장면 하나 없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예리하면서도 웃기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요나스 요나손#흑인#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인종 차별#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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