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사고나 工事도 없는데 왜 막힐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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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일상적 정체 현상의 원인… 물리-통계 등 과학지식으로 풀어
정체를 낭비와 헛수고 사례로 확장, 개인-기업 차원에서 절감법 제시

2차로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앞차와 뒤차 간 거리가 40m 이하로 좁혀질 때 정체는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거리는 위험을 감지한 뒤차가 급제동을 했을 때 앞차에 부딪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멈출 수 있는 제동거리와 거의 일치한다. 인간의 위험감지 능력이 사고 대신 정체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2차로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앞차와 뒤차 간 거리가 40m 이하로 좁혀질 때 정체는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거리는 위험을 감지한 뒤차가 급제동을 했을 때 앞차에 부딪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멈출 수 있는 제동거리와 거의 일치한다. 인간의 위험감지 능력이 사고 대신 정체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아침 출근길 지하철 종로3가역. 여기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 다음 광화문역에서 내리는 필자는 5호선 승강장에서 잠시 고민에 빠진다. 기다리는 이가 없는 출입문 앞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이미 줄을 선 다른 사람들 뒤에 설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냐고? 전자를 택하면 이번 열차를 확실히 타겠지만 정작 한 정거장 뒤 탔던 문과 같은 문으로 내려야 할 때 인의 장벽을 뚫느라 진땀을 뺄 게 뻔하고, 후자를 택하면 내릴 때의 수고로움은 적지만 타기도 전에 전동차 문이 닫혀 전자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서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꽉 막힌 고속도로 주행차로에서 하릴없이 앞차만 쳐다보고 있는 당신. 1∼2km 앞 분기점으로 나가면 되는데 마침 추월차로에선 차량들이 슬슬 앞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1분 1초라도 아끼려면 당장 끼어드는 게 정답이지만 막상 빠져나갈 분기점을 앞두고 주행차로로 끼어들지 못해 애초 주행차로를 계속 타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정체학/니시나리 가쓰히로 지음/이현영 옮김/304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낭비학/니시나리 가쓰히로 지음/이근호 옮김/272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정체학/니시나리 가쓰히로 지음/이현영 옮김/304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
◇낭비학/니시나리 가쓰히로 지음/이근호 옮김/272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일상의 도처에서 발생하는 막힘과 얽힘, 즉 정체(停滯) 현상을 본격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항공우주공학자로 일본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교수인 저자는 세상의 온갖 정체 현상의 수수께끼를 물리학과 통계학, 심리학 등 과학지식을 총동원해 풀이해주고 해법을 제시한다.

도로 정체의 원인부터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도로 정체의 가장 큰 원인은 과다한 신호등, 좁은 도로, 교통사고 때문이 아니다. 정답은 ‘새그(sag)’라고 불리는 도로 구간으로, 운전자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만한(100m당 1m 상승 또는 하강) 오르막 또는 내리막길을 뜻한다.

왜 그럴까? 오르막의 예를 들어보자. 미리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는 현격한 오르막과 달리 새그 오르막에선 운전자가 자기 차의 속도가 떨어지는 걸 인지하는 시점이 늦어진다. 뒤늦게 가속 페달을 밟지만 이미 뒤차 운전자는 앞차와의 간격이 좁아졌음을 알고 브레이크를 밟게 되고, 그 뒤차는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을 수밖에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체가 발생한다.

정체는 시간과 자원의 낭비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건물에서 큰불이 났을 때 사망자가 대개 비상구나 비상계단 근처에서 엉킨 상태로 발견되는 것도 정체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계단에서 사람의 이동속도는 평지 보행 속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아 ‘병목 현상’이 생기는데 동시에 여러 사람이 쇄도하면 정체가 심해져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초만원 상태의 전철에서 내릴 때 여러 사람이 동시에 내리려고 하면 몸이 끼여 꼼짝도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정체학은 때론 자연현상에서 인간계의 정체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개미다. 인간이 모는 차량과 달리 개미는 개체 간 거리가 가까울 때 오히려 이동 속도가 빨라진다. 휘발성 화학성분인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서로 가까울 때 길의 상태나 장애물 유무 등에 대한 정보를 쉽게 공유할 수 있어 속도를 내지만 서로 멀어지면 정보를 담은 페로몬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려 속도 내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는 것. 미래의 차에 대한 연구 초점이 앞선 차량의 속도나 교차로에서 주행 신호의 남은 시간 등을 공유하는 차량 네트워크 구축과, 이 정보와 연계한 속도 제어에 맞춰져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저자가 모든 정체를 악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산불이나 전염병의 확산 같은 경우는 오히려 효과적인 정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가 연구 과제가 된다.

함께 출간된 ‘낭비학’은 ‘정체학’의 문제의식을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낭비와 헛수고의 사례로 확장한 책이다. 낭비나 헛수고의 상당수가 정체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요리에 간을 너무 많이 하게 되는 메커니즘부터, 불량품 발생을 최소화하는 일본 자동차 회사의 생산방식, 매장의 냉난방에 쓰이는 전력 사용을 최적화하는 방법까지 개인과 기업 차원에서 응용 가능한 낭비 절감법을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알려주는 매력적인 책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일상 속 현상에 접목해서 응용하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갖췄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T제너럴리스트’라고 말한다. 지식의 깊이(|)와 폭(ㅡ)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하지 않는 융합형 인재를 이르는 말이다. 책 본문이 주는 재미도 재미지만 학제 간 칸막이 속에 갇혀 ‘그들만의’ 지식 생산과 소비에 바쁜 우리 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쓴소리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정체학#낭비학#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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