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경쟁神話는 모두 속임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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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배신/마거릿 헤퍼넌 지음·김성훈 옮김/604쪽·2만 원·RHK
가정-학교-기업-스포츠계 등 사례 실증적 분석… 결과만능주의 폐해 고발

2012년 런던 올림픽 400m 허들의 영국 대표 다이 그린은 7년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훈련해 금메달의 가능성이 높았지만 결선에서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쳤다. 스포츠계의 극단적 경쟁은 패배자에겐 좌절감을, 승리자에겐 허무함을 안겨주고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동아일보DB
2012년 런던 올림픽 400m 허들의 영국 대표 다이 그린은 7년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훈련해 금메달의 가능성이 높았지만 결선에서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쳤다. 스포츠계의 극단적 경쟁은 패배자에겐 좌절감을, 승리자에겐 허무함을 안겨주고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동아일보DB
2000년 벨연구소에 들어간 독일인 얀 헨드리크 쇤은 내성적이고 혼자 있길 좋아했다. 처음엔 연구소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초전도와 나노기술 분야에서 갑자기 뛰어난 성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획기적 논문을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올렸고 순식간에 벨연구소의 영웅이 됐다. 그의 연구는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가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는 더욱 혼자 연구에 몰두했고 평균 8일마다 저자 목록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왕성한 성과를 보였다. 그의 연구를 재현하려는 다른 학자들은 거듭 실패했으나 그의 명성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쇤의 여러 논문에 나온 자료가 사실상 같은 자료라는 것을 발견한 한 연구자의 폭로로 쇤의 사기극은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노벨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하고 트랜지스터 레이저 등을 개발한 벨연구소가 왜 그의 사기극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까. 또 쇤은 왜 대담한 사기극을 벌였던 것일까.

이 사건은 당시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 인수합병된 벨연구소가 실적을 올리기 위해 연구원 사이에 경쟁을 시켰던 것과 그런 경쟁 분위기 속에서 윗사람들이 원하는 결과를 ‘속여서라도’ 제출하고 싶었던 쇤의 합작품이었다.

지난해 하버드대에서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자퇴 권고가 내려졌다. 집에 가져가서 풀어오라고 한 시험 문제에서 유사한 답안지가 무수히 제출됐기 때문이다. 치열한 점수 경쟁이 빚어낸 비양심과 부정 행위였다.

이 책은 경쟁이 개개인에게 자극을 줘 효율성을 높이고 성과를 내게 한다는 오랜 믿음이 완전히 그릇됐다고 주장한다. 가정과 학교, 기업, 과학계, 스포츠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은 비효율과 낭비, 비리와 부정을 불러오는 독소라는 것이다.

불륜은 부부가 가정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다가 벌어지기 쉽고, 점수 향상을 부추기는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력과 의욕을 꺾어놓는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기업은 어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10여 년간 혁신적인 기술 개발에 실패한 건 ‘스택 랭킹’(고과 하위 10%를 강제로 내쫓는 것)의 결과라는 얘기를 임직원 인터뷰를 통해 들려준다. 랭킹 경쟁에 휩싸인 임직원들은 경쟁자를 헐뜯고 단기적 이익에 연연한다. 성과를 높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며 좋은 아이디어를 공개석상에서 말하지 않는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은행들이 수익 경쟁을 벌이면서 부실 대출을 마구잡이로 해주다가 빚어졌다. 안팎의 경쟁으로 창의력을 잃은 기업은 가격을 후려치고 제3국의 저임금 노동자를 사용해 비용을 줄이는 것을 혁신으로 받아들인다.

경쟁이 가장 자연스러운 스포츠계 역시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비인간적이다. 2010년 미국의 프로 미식축구 선수 48명은 “리그 주전으로 뛸 수 있다면 영구적 뇌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53.6%가 그렇다고 답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들을 비정상적 판단으로 몰아넣고 약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게 한다.

경쟁은 좀 더 크고 빠르고 힘센 것을 원한다. 덩치를 키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큰 덩치는 외부 위기가 닥치면 취약하기 그지없다.

저자는 경쟁의 폐해를 방대한 인터뷰와 사례 분석으로 짚어 설득력을 높였다. 여기에 각 분야마다 신뢰와 자유, 상호 헌신을 바탕으로 경쟁의 폐해를 막아온 곳과 방법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고어텍스로 유명한 ‘고어앤드어소시에이츠’의 모든 직원이 직급 없이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현장을 보여준다.

과연 경쟁이 이 폐해들의 원죄를 모두 뒤집어써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들지만 경쟁 없이도 창의력 효율성 위기대응력은 물론이고 인간적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경쟁의 배신#벨연구소#경쟁#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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