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사람은 쓰레기가 아니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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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페터 비에리 지음·문항심 옮김/468쪽·1만6000원·은행나무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소설-영화 등 사례로 근거 제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저자는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 윌리 로먼이 회사 사장에게 구걸을 하면서 존엄성이 상실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몇 차례의 구걸성 애원이 거절되자 주인공은 단발마적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레몬즙만 다 짜내고 껍데기는 던져 버리는 건가. 사람은 쓰레기가 아니지 않은가.” 동아일보DB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저자는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주인공 윌리 로먼이 회사 사장에게 구걸을 하면서 존엄성이 상실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몇 차례의 구걸성 애원이 거절되자 주인공은 단발마적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레몬즙만 다 짜내고 껍데기는 던져 버리는 건가. 사람은 쓰레기가 아니지 않은가.” 동아일보DB
‘삶의 격’이라는 무거운 제목에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란 딱딱한 부제를 보면서 마음이 짓눌린다. ‘의미는 있을 것 같은데 책 읽기는 꽤 어렵겠구나.’

‘리스본행 야간열차’ 등 묵직한 소설을 쓴 저자의 철학 에세이는 첫인상부터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서문부터 독자의 부담을 절반 정도 덜어준다. 그는 철학을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경험에 대해 이해 가능한 빛을 던지려는 시도’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존엄성의 개념 정의나 역사적 탐구, 철학적 고찰 등을 모두 생략한 채 ‘존엄성은 일상적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치며 그 안에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바로 시작한다. 일상적 화법에서 벗어나 철학적 개념에 집중하다 보면 그 개념이 돌연 낯설고 난해해지면서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 페터 비에리
저자 페터 비에리
만약 존엄을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재돼 있고 타인이 아무리 끔찍한 짓을 하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존엄성은 왜 신성한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등을 역사적 철학적으로 따져 묻게 된다.

저자의 접근법은 다르다. 존엄은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기준이 되는 하나의 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존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남이 나를 존엄하게 대하는지, 내가 남을 존엄하게 대하는지, 그리고 내가 나를 존엄하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어려울 수 있다고 본 것일까.

저자는 독립성, 만남, 사적 은밀함, 진정성, 자아존중, 도덕적 진실성, 사물의 경중에 대한 인식, 유한함의 수용 등 8가지 카테고리로 존엄을 설명하는 본문에서도 이해를 돕는 장치를 마련했다. 저자는 난쟁이 멀리 던지기 대회처럼 일상에서 경험한 일과 조지 오웰의 ‘1984’,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존 볼의 ‘밤의 열기 속으로’,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의 작품을 사례로 들면서 존엄의 조건과 양태를 독자 앞에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세일즈맨의 죽음’에선 애원하다 실패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느끼는 좌절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선 친밀한 관계에서의 사적 은밀함이 누설됐을 때의 위기를 모델로 삼아 존엄성을 얘기한다.

저자가 국내의 막장 드라마를 자주 봤다면 아마 이런 장면도 책 속에 넣었을 것 같다. 재벌 2세와 사귀는 여자에게 그 어머니가 나타나 두둑한 봉투를 내밀며 헤어지라고 통보한다면. 이건 존엄의 상실을 가져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과감하게 돈 봉투를 돌려주며 헤어질 수 없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 혹은 눈물을 흘리며 받아들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존엄의 상실을 피하는 길인가.

책이 정답을 말해주진 않는다. 저자는 삶의 순간에 부딪치는 결정적 문제 속에서 ‘존엄’을 생각하고 내 마음을 살펴 행동을 정하는 능력을 키울 것을 요구하고 그 여러 사례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그 능력을 가질 때 각 개인들이 서로를 이끌어주고 길을 터주고 굴욕감이나 모욕감 없이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 때로는 상대를 거부할 수 있다.

저자의 바람대로 독자들이 책을 읽고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말로 정리해 주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을 권한 서평도 의미가 있다. 특히 너무 거창한 주제여서 접근할 엄두도 못 냈던 존엄이 갑자기 우리 삶에 녹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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