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특집 | Google쇼크!

인간의 근거는 무엇인가 AI는 ‘국가시민’인가

‘알파고 파란’이 던진 철학적 질문들

  • 백종현 |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 paekch@snu.ac.kr

    입력2016-05-12 17: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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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이냐, 폭력이냐… ‘경계’에 선 과학기술
    • 인간을 ‘물리적’ 존재로 보는 근대 문명
    • 포스트휴머니즘의 질주…철학적 과제부터 풀자
    2016년 3월 구글의 알파고가 서울에 출현한 것을 계기로 많은 한국인이 인공지능(AI)을 새롭게 의식하게 된 것 같다. 이제 진보에 가속이 붙은 인공지능, 로봇, 드론,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자동차, 그리고 뇌과학, 의생명과학 등 과학기술은 자연생명체인 인간의 삶 전반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들 기술은 ‘이성적 동물’로 규정되던 ‘인간’ 개념 자체의 변경까지 종용하고 있다.

    알파고의 활약에서 보듯 인공지능은 이미 어떤 면에서는 자연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으며 기존의 지식 개념을 흔들고 있다. 인공지능처럼 날로 발전하는 생명과학 기술 역시 생명의 탄생과 유지 및 종결 방식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거듭 요구한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적으로 대신하는 단순한 로봇의 시대는 지났다. 정보통신, 생명과학, 인공지능 기술이 융합한 사이보그가 등장하고, 오래지 않아 자기산출 능력을 가진 유사인간 종(Post Homo Sapiens)까지 마주한다면 우리 자연인간들은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성’ ‘인격’이라는 인간의 본질 규정을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놓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서 인간 존엄성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인간의 자율성이다. 이 자율성의 본부로는 ‘정신’이 상정됐다. 이름하여 인간은, ‘정신적 존재자’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근대 문명의 형성과 함께 그 기력이 희미해져갔다. 근대 문명의 핵심요소는 시민사회와 과학기술이다. 시민사회의 토대인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기초인 자연과학은 근대인의 최고 성취라 할 것인데, 이 둘은 ‘정신’의 희생을 대가로 요구한다.



    기실 근대 문명은 정신과 신체의 분열로 시작돼 신체의 점진적 우위로 진전돼갔다. 많은 이가 ‘사람은 마음과 몸으로 이뤄져 있다’는 정신-물체 이원론에 동의한 것은, 그래야만 인간의 인간다움의 배경인 윤리세계를 자연과학의 물리세계로부터 분리·보존할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하지만 근대 문화와 함께 ‘정신’은 두 방면에서, 즉 정치사회와 자연과학의 협공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이념에서 출발한다. 주권재민은 투표권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투표권은 ‘1인 1표’로 실현된다. 이때 ‘1인’은 ‘하나의 몸’을 단위로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적으로 자유롭다고 선언하면서 주장한 첫 번째 자유의 권리가 ‘신체의 자유’다. 즉, 민주주의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신체적 존재자로서 인간인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정신적’ 존재자라기보다는 ‘신체적’ 존재자다.

    이는 인간이 인간임은 그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보통의 생각과 상충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충에서 자연과학은 민주주의 기조의 편에 선다. 자연과학이 이해하는 자연 세계의 사물들과 사건들은 모조리 인과관계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자연 안에 자유로운 존재자란 있을 수 없다.

    인간도 자연물들의 인과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물체일 따름이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체인데, 신체란 물체 이상의 것이 아니다. 무릇 물체의 움직임에 무슨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더 이상 행위의 주체, 인격으로 간주될 수가 없다.



    오래된 懷疑

    현대의 ‘과학’과 자연과학주의는 인격의 기반인 인간의 자율성,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해 부정적이다. 물리학주의이든 생물학주의이든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존재자의 운동은 물리 법칙에 따른다’는 물리학주의와, ‘인간의 행위는 뇌 운동의 외현인데 뇌의 운동은 무질서하다’는 생물학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론에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인간(homo)이 한낱 자연물인지, 그 이상의 품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오랜 논란을 더욱 격화시키고, 인간 위격(位格, humanism)의 근본을 뒤흔드는 상황을 빚은 것은 포스트 호모 사피엔스, 유사인종의 출현이다. 인간의 지능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그에 힘입어 종래에 인간이 해내던 일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해내는 로봇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생명공학이 추구하는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국면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수명 연장과 능력 증강에 대한 욕구가 과학기술을 부추기면, 아마도 자연인으로 태어난 인간도 종국엔 모두 사이보그가 될 것이다. 낡은 심장은 기계펌프로 교체되고, 부실한 신장과 혈관은 여느 동물의 신장과 혈관으로 대체된다. 파괴된 한쪽 뇌는 인공지능이 대신할 가능성이(또는 우려가) 점점 커진다. 생명공학적 조작으로 다수의 동일인이 대체(代替)적으로 생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 수명이 1000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당초 인간이 제작하고 조종하던 로봇이 정교화를 거듭해 마침내 스스로 로봇을 제작하고 조종해 인간을 제압하는 국면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식이야말로 힘이다”(프랜시스 베이컨)라는 매력적인 표어는 과학기술이 전근대적 삶의 고초들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나아가 의식주를 구하는 데 매인 인류의 삶에 자유와 여가를 줌으로써 충분한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나 지식은 타인을 지배하고, 자연을 개작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제한 없이 이용된다. 지식은 기술에든, 자본에든, 권력에든, 전쟁에든, 가리지 않고 힘이 된다.



    갈수록 자연과학이 대세로 자리 잡고 진리로 찬양받는 것은 우리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이용하는 지식”(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즉 힘을 자연과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자연, 즉 대상(객체)들을 지배할 힘을 증대해간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칫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협하거나 훼손할 수도 있다.

    산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 유용성이 확인되는 마당에 로봇의 기능은 급속도로 향상될 것이다. 인간의 끝없는 생명 연장 욕구를 충족시키는 의료기술과 함께 생명공학은 진시황의 소망 성취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 또한 개발될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그러한 궤도를 달린다.

    인간이 자연물이라면 자연물의 산출 또한 자연물인 만큼, 인간의 지능과 손을 거쳐 나온 인공지능과 온갖 인공적 조작 역시 실은 일종의 자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인공적(人工的, artficial)’이라는 말이 적용될 대상은 없다.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자연적(自然的, natural)’인 것이니까.

    이로써 자연인과 인공인간의 본질적인 구별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자연인이 인격체라면 로봇도 사이보그도 인격체다. 자연인이 대체 불가능성을 근거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은 근거를 상실한다. 자연인이든 로봇이든 사이보그든 모두 복제도 가능할 것이고, 동일한 것으로 대체도 가능할 것이다.



    꼬리 무는 질문들

    이제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관이, 포스트휴먼의 사회가 우리에게 시급하게 던지는 물음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인간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적 삶’,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제까지 인간은 ‘지(知)·정(情)·의(意)의 마음 능력을 바탕에 갖는 이성적 동물’로 규정돼왔다. 동물적 특성으로는 생명성(기초욕구: 식욕[생존본능], 성욕[번식본능]), 자기운동성, 유한성(죽음, 피로)이, 이성적 특성으로는 자아의식 곧 자기의식(주체의식, 이기심, 자존심, 유한성의식, 죽음의식, 종적 연대의식[역사의식])과 타자의식(객체의식, 동정심, 공감, 이타심, 시기, 멸시, 경쟁심, 존경심), 횡적 연대의식([사회의식]), 그리고 이에 더해 인격성(자율성, 자기기획, 자기책임, 윤리의식, 양심)이 꼽혔다. 무릇 이러한 인간상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물음들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어느 지점까지 의료기술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야 하는가?

    의료기술이 할 수 있는 한 생명을 이어간다면, 자연인으로 태어난 인간도 종국에는 사이보그로 생존할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 변형·복제·성형 시술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이를 인간의 기술능력이 미치는 한 허용한다면 결국 우생학적 조치를 하는 셈이 될 것이다.

    -‘동일인’ 개념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




    사이보그의 나라

    거듭되는 시술에 의해 자연인이 변형되어가면 어느 지점까지 ‘동일인’으로 간주해야 할까. 이에 대한 판정은 수많은 법률 문제를 수반한다.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물음도 뒤따른다.


     -노동 현장에서 로봇과 사이보그에게 일자리를 넘겨주고 인간은 단지 한가함을 즐길 수 있을까?


    자연인 노동자가 퇴직 후에 로봇의 노동력에 의해 연금을 받는 것이 좋기만 할까. 로봇이 배치되면서 줄어드는 일자리를 사람에게 어떻게 분배해야 합리적일지의 논의는 급선무 중의 하나가 된다.


    -전쟁터에서 자연인 부대와 로봇 부대가 전투를 벌이는 국면은 피할 수 있을까?


    이미 이런 초기 국면을 우리는 맞고 있다.
    그리고 끝내는 ‘포스트휴먼 사회’의 본질적 물음에 이를 것이다.


    -자연인과 로봇 또는 사이보그의 사회적 관계는?

    -로봇, 사이보그도 자연인과 똑같은 ‘국가시민’인가?

    -자기산출 능력과 자치 능력을 갖춘 로봇, 사이보그들이 독자적 국가를 세운다면?



    포스트휴먼 사회는 근대 문명의 총아인 과학기술의 진보와 그 덕분에 광범위한 찬동을 얻은 자연과학주의적 인간관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이런 사회가 야기하고 제기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성찰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철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인공지능, 로봇, 생명과학 등이 인류에게 복(福)이 되려면, 인간이 창출한 과학기술 일반이 인간의 품격을 고양하는 데 쓰여야 함은 당연하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성과가 인간성을 지속적으로 고양할 수 있는 방안이 늘 함께 강구돼야 한다. 인간 문명의 성과가 인간 문명을 파괴할 위험을 방지하고, 인간이 애써 취득한 힘이 인간을 궁지로 내모는 폭력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지금, 바로 논의를 시작하자. 

    백 종 현


    ● 1950년 전북 부안 출생
    ● 독일 프라우부르크대 박사(철학)
    ● 서울대 철학과 교수, 인문학연구원장
    ● 저서 : ‘존재와 진리’ ‘윤리 개념의 형성’
       ‘사회운영원리’ ‘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칸트와 헤겔의 철학’ 등
    ● 現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철학회 회장·이사장,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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