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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 13회. 다시 길 위에서 길 찾기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근년 들어 거주지를 옮길 때, 그가 마지막으로 싸야 하는 이삿짐은 언제나 책과 원고였다. 하지만 책은 서른 이전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때 끌고 다니던 책 보따리에서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고, 살림이 좀 펴면서 장서(藏書) 개념으로 사들인 것들은 장정이 번듯하고 케이스가 갖춰진 게 많은 데다, 서가(書架)까지 함께 맞춘 기획물 전집도 있어 진작부터 이삿짐센터의 인부들에게 맡긴 터였다. 그것들은 이미 전날 저녁 청색 테이프로 단정하게 봉함된 스무남은 개의 중간 크기 골판지 상자 속에 들어가 현관 어귀에 쌓여 있었다. 

따라서 그 아침까지 그에게 남겨진 것은 원고 짐뿐이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주무르던 원고 뭉치가 든 황색 봉투로부터 책상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쌓여 있던 참고자료, 잡기장, 이런저런 보충 자료 등을 긁어모아 몇 개의 와이셔츠 상자와 비닐로 된 8절지 크기 서류 봉투에 나누어 담다 보니 묘하게 신경을 건드는 복사물 묶음이 하나 있었다. 다음 작품에 쓸데 있을까 싶어 ‘인터내셔날가’ ‘적기가’ ‘빨치산가’ 같은 금지곡들의 노랫말 모음이나 ‘혁명가의 서원(誓願)’ 같은 출처 불명의 혁명교양 문서에, 6·25 전후의 좌익 선동 팸플릿과 선전 삐라 같은 것들을 복사해둔 것인데, 그 갈피 사이에 모서리가 비죽이 드러나 있는 노란 미농지 봉투가 바로 그랬다. 

그는 두 달 전 처음 그 봉투를 전해 받아 뜯어볼 때와 똑같이 섬뜩한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그 안의 편지를 꺼냈다. 전지에서 손칼로 잘라낸 것 같은 16절지 크기의 시험지 두 장이 겹쳐진 것이었는데, 지질(紙質)은 거무튀튀하고 거칠어 시중 문방구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못했다.

烋야 보아라. 

집안 두루 평안하냐? 그때 네 누나 희(熙)가 내 떠나오기 며칠 전 수원고롱(水原高農; 서울 농대의 전신) 관사 높은 창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그 뒤 어찌 되었느냐. 인천 쪽에서 들리는 함포 소리와 미제 폭격기의 불벼락에 쫓기는 중에도 그 어린 것이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앓던 모습이 사뭇 눈에 밟히더구나. 

나는 이곳 청진에서 환갑을 넘기면서 조국에 바친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감격에 겨워 산다. 이제 투쟁의 일선에서는 멀어졌으나 아직도 조국은 나에게 실존이다. 또 통일의 날이 오면 너는 이 북쪽에서 손아래 동기 다섯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네 소식은 이곳 군당일꾼들이 전해주어 알았다. 네가 썼다는 글의 요약도 들었고, 거창한 평설도 몇 구절 읽어보았다. 네 얼굴이 손바닥만 하게 나온 남쪽 신문도 보고. 

기껏해야 전하는 이의 마음에 드는 인용 몇 줄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한 네 글 일부의 요약이겠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데가 있었다. 너는 대체로 섬세하고 심약한 품성을 기른 것 같고, 땅과 사람의 일보다는 관념과 추상 쪽에 관심이 더 깊은 듯하구나. 

하지만 외세와 억압을 뼈아프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네 애매한 태도에 대해서는 한마디 일깨워주고 싶은 게 있다. 이제 너도 서른이 넘었으니, 고향과 문중을 아주 버린 게 아니라면 집안 족보쯤은 한번 훑어보았을 것이다. 경주에서 관향(貫鄕)을 갈라나온 이후 800년, 우리 족보 어디에도 예속과 굴종의 기록은 없다. 

주체 연호(年號)를 쓴들 네가 알겠느냐. 서력기원 1982년 가을 시월에 아비가 쓴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추신; 이게 시작이고 앞으로는 네게 다시 글 보낼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뒷날로 미루려 하였으나, 아무래도 이번 참에 마저 일러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덧붙인다. 그해 9월 만삭 잉부의 등에 업힌 너를 두고 떠나던 날에도, 그로부터 꼬박 32년을 흘려보내고야 우리 부자가 겨우 이런 편지나마 주고 받게 될 수 있을 줄 누가 차마 짐작이나 했겠느냐. 

네 바로 밑 동생 이름은 만경(萬慶)이고 너보다 여섯 살 아래로 양력 9월생이다. 그다음은 누이로 이름은 은경(恩慶)이고 만경과 세 살 터울 5월생이다. 그 뒤로도 내리 누이들로 차례로 세 살 터울인 혜경(慧慶) 윤경(玧慶) 현경(賢慶)이고 생월은 가을 8, 9월에 몰려 있다.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되더라도 그 아이들의 이름과 생월은 잊지 않도록 따로 옮겨 적어두어라. 

이곳에서는 이름에 항렬을 쓰지 않는다. 돌림자라는 게 있기는 하나, 서울 재탈환(너희에게는 1·4후퇴) 때 다시 인민군대를 따라 내려간 나는 유복녀나 다름없는 그곳의 막내에게 옥경(玉慶)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을 서울에 남아 있던 친지에게서 전해들은 바 있다. 그래서 그 뒤에 여기서 난 아이들에게는 그냥 남녀 가리지 않고 경(慶)자를 돌림자로 썼다.

진작부터 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의미의 정연한 전개에 익숙해 있는 그에게 그런 아버지의 편지는, 중문(重文) 앞뒤 절이 양해받음 없이 단절되어 있거나, 느닷없는 의미의 돌출로 낯설게 느껴지는 대로, 묘하게 감동을 주는 데가 있었다. ‘바친 것보다 받은 것이 많은 감격’이라든지, 미문화원 방화 같은 것으로 공공연히 드러나기 시작한 남한의 반미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그의 미지근한 대미 감정을 겨냥한 것 같은 족보 얘기는, 어느 정도 북한식의 문틀에 익숙해진 그에게 다소 생경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조국은 나에게 실존이다’ 같은 구절은 거의 충격과도 같은 감동을 주었다.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이후로 사르트르는 유럽 지성의 하늘에서 지는 해가 되었지만, 1980년대 초 한국 지성계의 하늘 한 모퉁이에서는 아직도 찬연한 노을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면에서 받는 여러 감동과는 달리,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는 사진 두 장이 동봉되어 북쪽에서 살아가는 아버지의 입지(立地)를 추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명함판 배판 정도 크기의 흑백사진으로, 한 장은 세로 사진인데 연구용 가운을 입고 실험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고, 다른 한 장은 연구실 책상에 앉아 크고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앉은 모습을 담은 가로 사진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두 사진 모두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 학자 또는 관록 있는 연구원의 실험실이나 연구실 풍경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었다. 

그 편지와 사진을 다시 노란색 봉투에 넣어 자칫 불온 문서 취급을 받을 여러 복사물과 함께 비닐 서류 봉투 깊숙이 갈무리하면서 그는 갑자기 사나운 가위눌림으로 끌려 들어가듯 그 편지를 전해 받은 날을 떠올렸다. 

2.
지난 구정 무렵 그는 갑작스레 한 고향 친지의 께름칙한 호출을 받았다. 1970년대 중반 들어 특이한 이력으로 고향 사람들의 선망과 주목을 아울러 받고 있는 먼 집안 아저씨뻘 되는 이가 집 근처 다방에 와서 전화로 그를 불러냈다. 

해방 이듬해의 10월(추수) 폭동 때 지역 ‘민청(民靑)’ 깃발 아래 한 며칠 앞뒤 없이 휩쓸렸던 그는 폭동이 진압되자 지역 주동자로 몰려 경찰에 쫓기게 되었다. 그래서 멀리 부산까지 달아나 숨어 지내던 그에게 용케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피신할 길이 생겨 1950년대 초 오사카 지역에서 불법체류자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요란스러운 한일회담에 이어 국교가 열리고, 다시 1970년대 들어 한일 왕래가 잦아지면서 남한의 가난한 친지들에게 선망과 환대를 받는 제일교포의 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줄곧 조총련(朝總聯)이었다가 근년 들어 민단(民團)으로 돌아선 뒤의 일인데, 그도 작년인가, 그 집안 아저씨뻘 친지를 한번 만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아버지의 근황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아재라이 누고? 왜 집에 안 들어오고 니보고 다방으로 나오라 카노?” 

전화를 끊고 마음 내키지 않은 대로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는데, 전화기 곁에서 주의 깊게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아, 거 왜 옛날 시월 폭동 때 지서에 불 지르고 일본으로 달아났다는 평해 아재 말입니다. 며칠 전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뭘 전해줄 게 있다네요.”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어머니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그 평해 아지뱀(아주버님)이 뭐를. 그래고, 전해줄 게 있다면 집으로 오면 되지 왜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노? 그동안 저짝(저쪽)에 붙어 이북이나 들락거리다가 민단으로 돌아서 남한 뻔득거리며 댕기게 된 지 인제 얼매 된다꼬. 나가지 마라. 그러매이 사람하고 어울랬는 거 좋찮다. 작년인가 서울에서 한번 만나봤다 카디, 니 뭐 그 양반하고 거래하고 있는 거라도 있나?” 

“그건 아닌데요, 뭔가 나와 단둘이 만나 긴하게 전해줄 게 있는 것 같네요.” 

“글타카믄 더 이상하제. 우리가 수숙(嫂叔) 간이라 캐도 서로 못 볼 사람들도 아이고, 전할 끼 있다믄 우리 집으로 와 나도 보고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는 게지. 무슨 접선하드키 따로 만나서 뒤숭 떨지 말고, 가서 만내거든 바로 집에 데리고 온나.” 

“그래보지요.” 

듣고 보니 그런 어머니의 말도 억지는 아니다 싶어 그는 그렇게 선선히 대답하고 나왔다. 

그런데 만나 보니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친척 아저씨는 웬 우중충한 등산모에 맞보기 안경까지 쓰고 다방 구석에 앉았다가 그가 가자 바로 노란색 미농지 편지봉투부터 내놓았다. 

“우선 이거 한번 읽어보고 얘기하자. ‘섬들 형님’ 편지다.” 

섬들은 한자로 도평(島坪)이라고 쓰는 그의 외가 곳 땅이름이었다. 결혼해 출입한 곳 땅이름을 택호(宅號)로 삼는 고향의 관례대로 아저씨뻘 친지가 ‘섬들 형님’이라고 부르면 바로 그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아버지의 편지가 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30년 세월 저쪽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세월의 무게만큼 사연도 길 것이라는 단정 때문이었는지, 다 읽고 나니 그 편지는 허망하다 싶을 만큼 짧았다. 16절지 두 장이지만 납작납작한 필체에 순한글로 쓴 내용을 두 번이나 읽는 데 채 5분도 안 걸린 느낌이었다. 

“섬들 형님이 무슨 뜻으로 내게 그런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다만, 우선 그걸 누가 네게 전했는지부터 여기서 확정해두자. 자식을 북송(北送) 보낸 조총련 교포가 자식을 만나러 이북에 갔다가, 어떻게 형님을 만나 그 편지를 받고, 다시 이남을 내왕하는 교포를 시켜 네게 전하게 한 것 같은데, 그 교포가 나는 아니다. 너는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니, 나 아닌 그럴듯한 가상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편지의 출처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인물을 대라.” 

그가 편지를 다 읽은 기척을 느끼자마자 아저씨뻘 친지는 아주 사무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다음 등산모만큼이나 후줄근한 바바리코트 깃을 한껏 세워 얼굴을 감추면서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여기 오지 않았다. 물론 너를 만난 일도 없고. 워낙 내용에 수상쩍은 구석이 없어 너에게 전해주기로 했지만, 실은 생각 없이 그 편지 맡은 거 후회 많이 했다. 청춘에 쫓겨났다가 환갑 다 돼 돌아온 고향, 이 일로 다시 찾아올 수 없게 된다면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 될 게다. 이후 편지는 네 마음대로 처분해라. 너희 집과 섬들 아지매는 다음에 내가 한국에 다시 나오게 되면 그때나 한번 찾아보마.”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 읽어 머릿속을 윙윙거리며 떠도는 것 같은 편지의 문면과 무언가 갑자기 엄중해진 상황 인식에 짓눌려 그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사이 그 친척 아저씨는 휘적휘적 다방을 걸어 나갔다. 그 아저씨가 계산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방을 나간 뒤에야 집을 나올 때 어머니에게 한 다짐을 떠올린 그가 급히 뒤따라 나와 도로 양편을 훑어보았지만, 그가 찻값을 치르는 사이 택시라도 잡아탄 것인지 거리 어디에도 그 친지는 보이지 않았다. 

“평해 아지뱀은?” 

그가 애써 뒤를 밟던 사람을 놓친 것만큼이나 허전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그때껏 거실 소파 곁을 서성거리며 기다리다가 물었다. 

“갔어요. 집으로 가자니까 다음에 한국 나올 때 한번 들러 옛날 얘기나 하자던데요.” 

그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 아지뱀이 전해주기는 뭘 전해주더노?” 

“뭐, 별거 없었어요. 이제는 그리 궁금할 것도 없는 월북한 집안사람들 근래 소식 몇 개에 최근 이북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들은 북송교포 이북살이 얘기 같은 거 조금 하다가….” 

그가 얼결에 그렇게 말을 둘러대고 아무렇지 않은 듯 글 쓰는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가 무슨 낌새를 알아챘는지 뒤따라 그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이북 소식이라면 너어 아부지 얘기는 안 하드나? 그래, 요새는 어디서 뭐 한다 카더노? 지난번에는 있지도 않은 원산(元山)농대라 카던가, 어덴가에서 교수질 한다 케쌓디.” 

“아버지 소식은 아니고요…. 지난가을에 이북 들어갔다 온 북송교포 가족한테서 들은 집안 월북자들 얘기 조금하고….” 

처음부터 어머니에게 아버지 편지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던 그는 아버지란 말이 나오자 펄쩍 뛰듯 그렇게 둘러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덮어씌우듯 말했다. 

“뭐라 캐도 니 거짓말 하는 거 내 잘 안다. 어릴 때부터 니 눈 딜따(들여다) 보면 거짓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금방 안다. 하마 눈동자가 안정치 못하고 흰자위가 유별나게 허여면 거짓말하고 있는 게라. 바로 말해라. 너어 아부지 소식이제? 아이, 너어 아부지가 편진 동 뭔 동 물건을 보냈제? 몰래 전해야 하는 걸로. 세월이사 많이 지내갔지마는 내 그 사람들 하는 수작이라 카믄 아직 훤하다. 에미한테 바로 말해라. 너어 아부지가 뭐를 니한테 보냈는지. 에미 애 달아 죽는 꼴 안 볼라 카거든.”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나오면 하는 수가 없었다. 그는 한 더 읽어보고 최종적인 처분을 판단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속주머니 깊숙이 넣어둔 편지를 봉투째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며 짐짓 심각해진 어조로 말했다. 

“짐작하고 계시니 할 수 없군요. 혼자 읽어보고 어머니께 보여드리거나 그냥 태워버리거나, 경찰 대공(對共) 부서에 넘겨줄 것인지 결정하려 했습니다만.” 

그러자 어머니가 문득 허옇게 질린 얼굴로 편지를 받더니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내 허겁지겁 읽어나갔다. 그러나 몇 줄 읽기도 전에 무엇에 체한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거리며 편지를 든 왼손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안 되겠다. 도저히…. 나는 못 읽겠다. 이거 니가 읽어봐라.” 

“어머니. 왜 그러시는 데요? 무슨 일이세요?” 

그가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받으며 놀라 물었다. 그에게 편지를 넘긴 어머니가 이제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안고 헐떡임이 조금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그 편지 그거, 너어 아부지가 쓴 거 아이다. 이러매이(이따위) 글은…. 도대체 읽을 수가 없다.” 

“평해 아재가 아버지에게서 직접 받은 것은 아니라도 틀림없이 아버지가 쓰신 거 맞다고 하던데요. 저도 읽어보니 우리 집안 일 생판 모르는 남이 쓴 거 같지는 않고.” 

그가 숨 가빠하는 어머니를 부축해 집필 의자에 앉히며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돌 지나고 헤어진 뒤로 사찰이 겁나 사진 한 장 남긴 게 없는데, 애비 얼굴도 기억 못 할 니가 뭘 안다꼬? 글치만 에미는 너희 5남매를 낳고 꼬박 15년을 그 사람하고 살았다. 오랜 세월 지났지만 그 사람 일이라면 아직은 니보다는 더 안다. 우선, 그 글씨가 아이다. 아부지가 심하게 쫓기 댕길 때는 필체까지 이래저래 바꾸기도 했지마는, 그래(그렇게) 도리 납작한 글씨는 내 한 번도 못 봤다. 거다가….” 

“거기다가 또 뭐요?” 

“글 내용도 흉악타. 너어 아부지, 집안이 다 알아주던 효자였드랬다. 동경 유학 때 철철이 다달이 어맴한테 문안 편지 올리든 그 효자가, 어예(어찌) 30년 만에 보내는 편지에 안부 한 마디가 없노? 그것도 불구디(불구덩이)에 내삘어(내버려)놓고 간 홀어무이(홀어머니)한테. 아무리 세상 배리실(버릴) 연세가 됐다 캐도 어예 허뿌(허투루) 한 분(번) 생사조차 안 물어보노? 그래고 뭐라? 그 미친년 뛰고 길고 놀다 창틀에서 떨어진 거 인제 와서 눈에 밟힌다고? 아이다. 그기 만약 참말로 그 사람이 쓴 편지라면 다 파이다. 하마 인사가 망했다. 망해도 아주 폭망했다. 하늘이 용서 않을 게다.” 

어머니가 그래놓고 다시 한참이나 가슴을 내리쓸다가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이다, 니한테 그 편지 마자 읽힐라(읽히려고) 캤는데, 그만 놔또라. 더 들을 거 없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어머니가 편지를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 것 같았다. 구태여 역정을 더 돋울 뒷장까지 다 읽게 할 게 없다 싶어 아직 봉투 속에 담겨 있는 사진 두 장을 꺼내 어머니 앞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그래도 아버지 모습은 한번 보아두시지요. 헤어지신 지 32년 만인데.” 

그러자 웬일인지 어머니가 말없이 그가 내미는 사진들을 받아 가만히 살폈다. 그래도 아버지의 모습은 궁금하신 거구나, 그가 그러면서 조금 마음을 풀고 있는데, 다시 어머니가 삭막한 목소리로 타박 주듯 말했다. 

“걸치고 있는 이 옥양목 의사 까운 함 봐라. 누구 걸 빌려 입었는지 옷자락이 무릎에서 한 자는 올라가 있다. 소매도 글코. 소매가 짧아 까딱하믄 팔꿉 나오겠다. 나이 칠십이 다 돼 반동가리도 안 돼는 학생들 가운이나 빌려 입고 이거 뭐하는 짓고(짓이고)? 연구실은 또 뭐 이매이(이따위)가 다 있노? 우리 소학교 아아들 과학 실습실보다 못하다. 지금 딜따(들여다) 보고 있는 거 저거 현미경이라 카는 거 아이가? 저기(저것이) 우리 아아들 다니는 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 교재보다 나을 게 뭐 있노?” 

그렇게 넋두리처럼 늘어놓다가 다시 책 읽는 사진을 보고는 드러내놓고 빈정거렸다. 

“팔십에 능참봉을 하이, 하루아침에 거동(거둥)이 열두 번이라더니 이게 무슨 일이고? 어디 대단한 연구실에 칠순 노학자가 나와 저래 책을 열심히 보고 있노? 보자, 책도 이거 대단한 책 같네. 저렇게 두터운 데다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데가 있는 게 사진 같은 거 많이 쓴 백과사전쯤 되는 모양이제? 거 참 가관이다. 그눔의 공화국은 아무데나 늙은 사람 델따(데려다) 안차(앉혀) 두툼한 백과사전 한 권 펼쳐놓고 사진 찍어 보내면, 그 대단한 대접 보고 이남 사람들 모도 껍북 죽어 넘어갈 줄 아는 모양이제.” 

슬쩍 훑어본 것 같은데 그렇게 예사 아닌 눈썰미로 급조된 연출을 지적해 냈다. 서럽고 애처로운 풍경이면서도 가슴 구석에 써늘한 바람이 몰아가는 듯한 느낌이 이는 회상이었다. 그게 이제 두 달 전인가.

3.
그가 갑작스러운 회상에서 깨어나 서재 짐을 마저 정리하자 인부들이 기척을 알고 들어와 짐을 들어냈다. 책 짐과 원고 짐에 자료뭉치나 문구류를 담은 골판지 상자들은 현관문 앞 잔디밭에 모아둔 살림살이 포장 짐 곁에 쌓고, 간단한 운반용 부분 포장을 한 책상과 책장은 대문 쪽에다 쌓아둔 가구 짐 곁에 끌어다 놓았다. 모든 이삿짐을 서울까지 옮겨줄 8t 화물트럭이 오면 옮겨 싣기 좋게 배치하는 것 같았다. 

“복덕방에서 전화 왔어요. 인감도장하고 이전등기 서류 갖춰 가지고 복덕방 사무실로 나오라고 하네요. 사법서사도 벌써 거기 와 있다고 하네요.” 

짐을 모두 들어내 휑한 집 안을 서성거리며 생애 처음으로 마련한 그 집에서 보낸 3년을 무심히 돌아보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말했다. 그 무렵에는 이미 부동산 사무실로 호칭이 바뀌어가고 있는데도 아내는 아직 입에 익은 대로 복덕방이라고 불렀다. 사들일 때만 해도 시내 동네 두 칸방 전세 보증금이 넘었던 백색전화가 그사이 헐값이 돼, 몇 푼 되지도 않는 그 전화기 값을 옴니암니 따질 것 없이 새 집주인에게 그냥 넘겨주었는데, 덕분에 떠나는 그날까지도 전화가 살아 있었다. 

그가 따로 준비해둔 서류 봉투를 들고 동네 부동산 업체 사무실로 가니, 아내가 말한 대로 그날 거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모두 와 있었다. 

“5천(만원) 대면 주거용으로는 꽤 큰 매물인 데다 계절이 음력 설 앞뒤라 여기 주택 시장에서는 거래가 좀 더딜 거 같앴는데, 세상만물이 다 임자가 따로 있더구마는. 우쨌튼지 ‘개 보름 쉬듯’ 한다던 그 보름날에 임자가 나서 집도 안 딜따 보고 계약한 지 달포 만에 막대금 치르게 되었으니 양쪽 모두 축하하요.” 

얼굴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중년의 부동산 소개소 사장이 강한 남도 억양으로 그렇게 운을 뗐다. 주택을 사기로 한 40대 남자가 별로 표정 없는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솔직히 정원에 반했습니다. 다른 집은 신축 단지라 그런지 수종은 그럭저럭 구색을 갖춰도 3년이 되도록 지주목 새끼줄 덕지덕지 감고 매단 채 시들어가는 게 태반인데, 그 집만 옮겨심기 어렵다는 소나무 한 그루도 상하지 않고 모두 부목을 뗐더군요. 특히 앞마당 이스라엘 잔디가 아주 고왔고, 따로 구해 심으신 듯한 자목련이나 능소화 넝쿨 같은 것도 달리 보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선생님 주택이더군요.” 

그 말이 너무도 반듯하고 진지하게 들려 그도 절로 정색을 하고 받았다. 

“제가 태생이 호롱불 밑에서 도랑물 먹고 자라 그런지 내 뜰 안에서 나무 말라 죽고 풀포기 시드는 걸 보지 못합니다. 그걸 귀하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주고받자 나머지 거래 절차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주택 매도가 순조로운 게 고마운 그는 등기이전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를 넘겨주고 또 사법서사가 지정한 곳에 인감도장과 오른쪽 엄지 무인을 찍어주었다. 예절바른 매입자는 국립은행 액면 1천만 원 수표 2장으로 잔금을 치렀는데, 그게 들어 있는 봉투 안에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그 은행 부지점장의 명함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난 3년 익숙해진 골목 모퉁이를 돌아 저만치 눈에 익은 집안 정원수가 드러나면서, 갑자기 무언가 속에서 울컥 치솟는 서러움과 아쉬움의 정조가 있었다. 이제 정말 이 골목 이 거리, 그리고 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란 갑작스러운 인식이 그때까지 밝고 산뜻하던 그의 정조를 잠깐 동안에 변환시켜버린 듯했다. 이제 더는 이 도시에 내 집이 없고, 사랑하는 가족 누구도 이 도시에 남지 않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가 서울로 이주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곳을 떠날 마음의 채비를 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지방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집에 들어앉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정작 이주를 위한 실제적인 과정에 들어가는 데는 이전과는 달리 적지 않은 주저와 미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타협과 체념의 여러 단계를 거쳐, 이미 떠나기를 결정하고서도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살던 집을 부동산 시장에 내놓는 것으로 실제적인 이주의 결의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게 실은 북으로 간 아버지에게서 32년 만에 온 편지 때문이었다니. 거기서 그는 까마득한 세월 속에 깊이 봉인돼 있던 기억을 소환해내듯, 갑자기 지난 구정 무렵의 어느 아침을 떠올리고,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란 기분으로 동네 부동산 소개업자를 찾아가게 된 까닭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그게 성년이 되어 여섯 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어렵게 내린 이주의 결단이 아니라, 어릴 때 어머니가 철저하게 지키던 어떤 원칙이 세대를 바꾸면서 변이되어 그에게 유전된 것은 아닐까, 경찰이 우리 있는 곳을 알고 찾아왔으니까 우리는 떠난다…. 그러자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려오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버지가 다시 우리를 찾아왔으니까 우리는 떠난다. 

돌아오니 집 앞에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8t 화물차가 서 있고 평소에는 쪽문만 쓰는 철대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집 안 정원의 잔디밭에서는 이삿짐 포장을 마치고 차에 싣기 편한 동선에 따라 쌓여 있는데 정원 잔디밭 위에는 이삿짐센터 인부들이 펼친 골판지 상자를 돗자리 삼아 이른 점심을 먹고 있었다. 배달시킨 중국요리였는데, 아내가 선심을 썼는지 단품요리 식사에 곁들인 쟁반요리가 아주 푸짐했다. 

“고속도로 사정이 우딴지 몰라도 이 짐 싣고 서울에 도착하는데 최소한 여섯 시간은 잡아야 될 낍니더. 거다가 서울서 짐 내리는 시간도 있어 밤 열두시가 넘어야 대구 돌아올 수 있을 끼구예. 점심부터 먹이고 바짝 다그쳐야 될까 말까 라예.” 

서울까지 따라가 짐을 부려줄 인부 다섯 가운데 팀장 격인 중년 인부가 그 상황을 그렇게 일러주었다.

4.
인부들과 함께 간짜장 한 그릇으로 이른 점심을 때운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 안 청소를 맡은 아주머니 둘이 짐이 다 나간 안방과 건넌방을 긴 대걸레로 닦고 있었다. 그는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서재를 살펴보았다. 다른 방들처럼 짐은 대부분 밖으로 나갔으나 중요 서류로 분류돼 특별한 표시가 된 골판지 상자에 담긴 원고 짐 두 개가 아직 방 안에 있고, 그가 무슨 중요한 약속이나 잊어서는 안 될 일정 같은 것을 아무렇게나 낙서해둔 달력도 벽에 걸린 채였다. 

그달 3월 말일 가까운 날짜에 하루 간격으로 갈겨쓴 푸른 사인펜 메모가 있어 다가가 읽어보니 29일자에 ‘대구 소설. 가보세 7시’, 31일자에 ‘비가비 요석궁 6시’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주말 부근인데, 대구 소설가들과 시동인(詩同人) ‘비가비’ 사람들이 맥주홀 ‘가보세’와 요정 ‘요석궁’에서 서울로 떠나는 그를 위해 술자리 만든 일을 통고받고 메모해둔 것이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가보세’에서는 대구의 소설가 선후배 여남은 명이 모여 생맥주로 상경을 축하하며 문운을 빌어주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본격적인 중앙 문단 편입’을 보는 그들의 과도한 선망과 노골적인 폄하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밤 12시에 끝이 났다. 그리고 ‘요석궁’ 술자리는 ‘슈바벤 등불’의 시인이 ‘비가비’ 동인도 아니면서 물주가 되어 판을 키우는 바람에 수십 년 만의 야간 통금(通禁) 해제가 제대로 빛을 보았다. 

그는 방 안에 남은 서류상에 걸터앉아 아직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의 두 밤을 가만히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그 두 모임을 지배하는 정조는 여전히 ‘떠나가는 배’였고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였다. 그대로 변방의 지방 문단에 남아 중앙의 중심 문화에 갈망과 동경의 눈길을 보내야 하는 열패감이 만들어낸 설익은 의심이나 야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서 더욱 처절하게 헤쳐가고 타고 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더 커 보였다. 

그런 그 술자리의 기억이 다시 한번 자신이 아주 서울로 떠난다는 것을 어둡게 상기시켜 그를 침울하고 회고적인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나는 진작부터 ‘뿌리 뽑힌 자’였고, ‘영문 모르고 매 맞는 아이’였으며, 그리하여 ‘머무르면 드러나고 붙들리게 되어 있는 도망자 신세’이고, ‘구름이 되어 오래 떠돌지 않으면 안 되는 우레’였고, 극단하게는 ‘비상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르시스’였다. 

그 바람에 일찍부터 뿌리 뽑힌 자, 영문도 모르고 매 맞는 아이로서의 피해의식은 거기에 알맞은 떠남의 동인을 하나 더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바로 지난여름의 연좌제 폐지 통보였다. 신문사를 그만둔 이후 그를 담당하는 경찰 대공(對共) 분과는 자신의 주거지를 관할하는 동대구서(署)에 있었고, 담당자는 박 씨 성을 쓰는 형사였다. 그해 초 그는 느닷없이 5공화국 헌법에 반영된 연좌제 폐지 조항을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그동안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그의 집을 찾는 박 형사가 통 걸음이 없더니 그 봄이 늦어서야 찾아왔다. 

“선생님, 마지막 작별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이제 연좌제 정말로 끝났습니다. 오늘 선생님 관련 서류 마지막으로 폐기됐습니다. 이제 다시는 선생님 찾아오는 일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 되었다면 반갑고도 반가운 일입니다만, 솔직히 마음 놓이지는 않는군요. 63년 대통령선거 때인가, 공화당 박정희 후보도 연좌제 폐지를 공약처럼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당선되고도 지키지는 않더군요.” 

“자신의 약점 때문이겠지요. 대공 부서에 몸담은 지는 몇 년 안 되지만 이번에는 진짜 같습니다. 신군부니 쿠데타니 헐뜯고들 있지만 정말 난 분은 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작별 인사로 절까지 넙죽 하고 갔다. 그 뒤 연좌제 폐지는 공공연한 논의 대상으로 사회 표면에 떠오르고, 문인 해외연수라는 게 기획되어 그는 난생처음 유럽 여행까지 하고 왔는데 몇 달 되지 않아 그 재일교포 친지가 아버지란 악몽을 되살려낸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찾아왔으니 내가 누구인지 훤히 알고 있는 곳에서 나는 떠나야 한다. 할머니의 말씀처럼 큰물머리를 맞기 전에…. 그런 아득한 도망자의 정서가 되살아나고, 그게 정붙여 살던 집까지 부동산 소개업자에게 내놓으며, 서울로의 이주를 서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인부들과 나누어 마신 배갈 몇 잔의 또 다른 별난 효능일까. 한편으로 그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는 그 순간도 뻣뻣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한 갈래 또 다른 의식도 있었다.

5.
그들 여섯 식구와 8t 화물차 조수석에 다 타지 못한 이삿짐센터 인부 둘을 합쳐 여덟이 탄 승합차가 고속도로를 내달려 강남 서초동 대성빌라에 들어선 것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빌라 건물은 아직 공지가 많은 얕은 비탈에 기우는 4월의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는데, 42평형 빌라가 층당 10가구에 5층으로 들어서 바로 곁에서 쳐다보기에는 제법 웅장했다. 

아직 짓고 있는 이웃 단지의 2층짜리 날림 빌라와 둔덕 저편으로 약간 내려앉아 보이는 성당, 그리고 작은 골프연습장이 반경 1km 이내에 있는 건축물의 전부라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만치 6차선 도로 건너 진흥아파트나 다시 남쪽으로 신동아, 우성 따위 12층 대형 아파트가 솟아 있었으나 거기서는 아예 딴 동네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 빌라 앞마당까지 붉은 2차선 아스팔트길이 빤하게 열려 있는 게 오히려 신통할 정도였다.
 
“지금 한창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락해볼 길이 없으니, 우리끼리 먼저 내려가서 저녁이라도 먹어놓자.” 

빌라 분양 사무소 직원이 나와 그들이 살게 될 305호 빌라 열쇠를 내주었으나, 주민이 절반도 차지 않은 빌라 안에는 마땅히 앉을 곳도 없어 식구대로 이리저리 서성이는 걸 보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 도중에 들른 휴게소에서 저마다 한 가지씩 과자봉지를 집어 들었던 아이들이지만, 아무도 먹자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인부들도 찬성이었다. 

“그라지요. 아매 그 사람들도 휴게소에서 저녁 때우고 오느라고 쪼매 늦을 낍니다. 대구 서울 고속도로 이사 한두 번 해보는 기 아이라서.” 

“그래도 8t 트럭 하나 꽉 찬 이삿짐인데 밤중에 들어 올리기 쉽겠어요? 아무리 3층이라지만 승강기도 없는데. 거기다가 짐 다 들어 올리고 되돌아 대구까지 밤길 고속도로 내려갈 걱정도 해야 하고.” 

“짐 보이 머, 피아노도 없고 가구도 크고 무거운 보르네오는 아이드구마는, 그래고 한 차 까뜩이라 카지마는 짐도 싣기 나름이고. 운전수 미리 재우고도 우리 넷이 바짝 붙으면 세 시간으로 찍 할(실컷 될) 끼라예. 그라고는 늦어도 11시에는 빈 차 고속도로에 올릴 수 있을 낍니다. 그 뒤는 운전수한테 맡기고 우리는 한숨 푹 자면 되고….”

빌라 앞 궁색한 주차장에 내리면서부터 어두운 기색으로 입을 다문 아내가 추궁하듯 그에게 새 주거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은 비탈 아랫동네 큰길가에 문 연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설렁탕집에서였다. 식구대로 시킨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때까지 별말 없던 아내가 별로 비꼬는 기색 없이 물었다. 

“그래, 이 동네가 서울에서도 가장 잘 나간다는 강남에, 그중에 가장 노른자위 같은 동네 서초동이란 말이에요? 모든 일이 기세로 시작하는 거라, 그래서 서울로 올라간다면 마땅히 찾아가 첫 이삿짐을 풀 동네로….” 

“음, 그랬지. 지금이라도 궁금하면 길을 막고 물어봐. 아직도 모두 그렇게 대답할 걸. 그래서 내가 이번 서울 길에서는 가장 먼저 내리기로 진작부터 찍어놓은 동네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보니 사람은 언제나 처음 내린 동네에서 이리저리 몰리다가 결국은 멀리 가지 못하고 그 동네에서 끝장을 보거나 아주 떠나게 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번 상경은 처음부터 여기서 시작해보려고 작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기세, 이렇게 애매하고 불확정적인 가능성은 아닐 것 같은데요.” 

“아냐, 지난번에 이 동네 부동산 소개소 사무실에서 인근 도시개발계획을 본 적이 있어. 이 동네 곧 상전벽해로 눈부시게 발전할 거야. 아주 좋은 뜻으로.” 

“그렇다고 변두리 야산 비탈에 지은 연립주택도 강남 금싸라기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구 변두리 연립주택에도 빌라라고 이름 붙인 데가 있기는 하지만,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있는 42평형 붉은 벽돌로 외장 마감한 빌라를 연립이라고 마구 불러서는 안 되지. 대구 우리 집 그거 제법 규모 있는 주택단지였지만 실제 건평은 50평도 채 안 됐어.” 

“그렇지만 그래도 대구 그 집은 대지가 90평이나 되었지요. 더군다나 이 빌라는 42평이라 해도, 공용 지분 빼면 35평도 될까 말깐데, 거기에 당신 서재로 쓸 6평은 따로 떨어져 있는 지하라면서요?” 

“당신도 이 집 구조 잘 아는 거 보니 그새 복부인 다 된 모양이네. 하긴 여기서도 대구 같은 단독주택을 먼저 알아보았지. 그런데 단독주택으로 대구 집과 비슷한 규모는 값이 꼭 네 곱절이 되더구먼. 우리 가진 돈 탈탈 털어 긁어모으고도 은행 융자 1억은 보태야 할….” 

그때 마침 주문한 꼬리곰탕이 나와 그의 짜증이 빈정거림에서 핀잔으로 바뀌는 것은 막았다.

그들 일행 여덟이 천천히 저녁을 먹고 대성빌라로 돌아가니 화물트럭과 인부들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화물차 덮개를 벗기고 이삿짐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고 있었다. 짐작대로 그들은 마지막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짐을 내릴 채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았다. 날은 이미 저물었지만 빌라 주차장 외등이 밝은 데다 내부 조명도 좋아 이삿짐은 승강기나 곤돌라 없이도 차근차근 305호실로 올라갔다. 

평소에 하도 부러워하기에 근래 어머니 방에 넣어둔 자개농이 빌라 계단 층계참을 도는 데 말썽을 부리고, 무거운 책 짐 때문에 인부들이 땀을 좀 흘리기는 했지만, 같은 차를 타고 온 인부들이 예상한 대로 밤 11시가 되기 전에 짐을 부리는 일은 끝났다. 그가 8t 트럭 운전사와 인부들에게 섭섭하지 않게 품삯을 나눠주고 차를 돌려보낸 시간은 11시 10분. 그걸로 그날의 장정은 끝났다. 

평수로 짐작은 했지만, 짐을 제대로 풀지 못해 방 셋을 모두 침실로 쓸 수 없게 된 그들 여섯 식구는 첫날밤의 잠자리에서 이미 만만치 않을 서울살이를 예감해야 했다. 방에 다 들여놓지 못한 짐 때문에 좁아진 거실에 식구대로 몰려 자게 되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집 실내 평수로는 살림살이를 아무리 잘 정리하고 갈무리한다 해도 대구에서와 같은 여유를 누리기는 글렀다는 걸 알아보았다. 또 강남대로 중심가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2차선 이면도로 사이에 자리 잡아 군색하게 맞춰가야 할 생활 여건도 그리 좋은 전망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만은 달랐다.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맞는 첫 밤의 감회를 그대로는 넘길 수가 없어 12시가 다 돼 4차선 대로변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얼큰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밖에서 한 아름 사가지고 돌아온 통닭과 맥주를 풀어놓고 막 잠이 들려는 아이들과 어머니를 깨웠다. 그리고 낮에 대구를 떠날 때의 어두운 상념과는 달리 서울에서의 밝은 전망을 늘어놓으며 모두를 격려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술이 올라서는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자신의 포부와 결의를 무슨 선언문 선포하듯 했다. 

“너희들 둔주곡 알지? 바하의 둔주곡. 서로 다른 여러 개의 가락이 함께 진행하는 형식의 곡 말이야. 이 둔주곡은 협화음과 불협화음 공간을 아우르며 지나는데, 나는 이제 이 서울에서, 우리 공간의 중앙, 시간의 중심이 되는 이 서울에서 아주 고약한 불협화음 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둔주곡을 들으려 한다. 잘못 알아들으면 우리 모두 터도 망도 없어질 치명적인 곡을….” 

그러나 어느새 식곤증으로 꾸벅 졸고 있는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제1부 끝>


作家 後記
아주 적절하지 못한 시기에, 잘 해내지도 못할 얘기를 꺼내 독자 여러분을 어리둥절하고 지루하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당분간 쉬면서 제1부를 보충 수정함과 아울러 제2부를 전작으로 할지, 억지스럽게라도 연재를 재개해서 스스로에게 완결을 강요하게 할지 진지하게 고심해볼 작정입니다. 이 문 열


신동아 2018년 8월 호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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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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