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1.5%P차이로 내가 당선… CIA 자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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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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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31〉눈물의 합당

1992년 11월 초, 통일국민당의 서울 강남갑 지구당 결의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정주영 대표와 새한국당 이종찬 의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대선출마 포기 선언 이후 정주영 대표는 반YS의 기치를 내건 이종찬과 새한국당 끌어들이기에 공을 들였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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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초, 통일국민당의 서울 강남갑 지구당 결의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정주영 대표와 새한국당 이종찬 의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대선출마 포기 선언 이후 정주영 대표는 반YS의 기치를 내건 이종찬과 새한국당 끌어들이기에 공을 들였다. 동아일보 DB
1992년 대선을 앞둔 11월 말부터 민주당과 국민당의 접근이 더욱 활발해졌다. 국민당은 정몽준 의원이 전면에 나섰다.

“우리 아버님은 정치 오래 안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가 옵니다. 이번엔 아버님을 도와주십시오.” 간곡한 권고였다.

선거를 일주일 남긴 12월 11일 밤 9시 서울 삼청동의 현대 영빈관에서 정주영 대표를 만났다. 정 대표가 먼저 합당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선거에서 이기셔야죠. 건강은 괜찮습니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항변했다.

“왜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나에게는 한마디 의논도 안 하는 거예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지금 다들 무어라 하는지 알아요? 이종찬은 정치적으로 죽었다고들 해요. 그런데 혼자서 다 결정하고 나는 뭐예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부터 한숨도 안 잤어요. 철우도 화가 나서 난리를 치고 친구들과 나가버렸어요.”

아들 철우는 친구들과 유세정책팀을 조직해 동숭동 우당기념관에서 밤을 새우며 뒷받침을 해 왔다. 얼마나 허망했겠는가? 나의 실수였다.

지구장 위원장 설득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구당 위원장들은 장경우 사무총장을 오해하고 있었다. 자칫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간 나를 위해 헌신해 온 오유방, 홍성우 전 의원은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

“아무리 당 대 당 통합이라고 하지만 누가 이것을 믿어요? 재벌에 당을 팔아먹은 것 아니고 무엇입니까?”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이 무렵 나의 처지를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말은 없었다. 가장 아픈 것은 가족까지 나를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12월 14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국민당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의외로 그 전날 나를 비난하던 지구당위원장 여러 명이 당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정주영 후보의 선거일정에 따라 헬리콥터 편으로 포항에 내려갔다. 그리고 영덕, 경주, 부산을 돌아 상경했다.

서울 인사동 새한국당 당사에 돌아와 앉아 있는데 장 총장이 들어왔다. 국민당에 긴급 자금을 요청하여 어제 밤을 새워 70여 개 지구당 위원장들에게 1차 선거자금을 풀었다는 것이다. 위원장들이 예상보다 많은 자금을 수령하고는 만족해서 돌아갔다고 했다. 가난한 빚쟁이들이 피를 팔아 전당포 빚을 갚았다는 소설 속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비참했다.

장 총장은 대단히 영리했고, 기업 경험도 있었다. 그는 기업하는 사람들과는 철저하게 계산해야 한다고 했다. 대선이 끝난 뒤엔 보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유세 마지막 날인 12월 17일. 유세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 후보가 쪽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정주영 후보 근소한 차로 당선 확실! 예측 정주영 32.5%, 김대중 31%, 김영삼 30%, 박찬종 5%.’

“어디서 나온 자료입니까?”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오늘 오전에 조사한 것인데 아까 유세장에서 극비리에 나에게 전해준 것이오.”

그 순간 나는 ‘누군가 또 정보장사를 했군!’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박태준 최고위원도 미CIA 정보에 자기가 대통령후보로 나가면 승리하는 것으로 돼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똑같은 수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주영의 참담한 패배였다. 김영삼 42%, 김대중 34%, 그리고 정주영은 고작 16%를 득표해 양김 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주영은 동생 정세영 회장을 김영삼 당선자에게 보내 현대그룹의 정치 참여를 사죄해야 했다.

이듬해 1월 4일 정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서실에서 유난히 친절하게 안내하는 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새한국당과 당 대 당 합당 문제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법적인 문제를 많이 생각하지 못하고 덜컥 합의하고 서명했는데….”

정 대표는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어 새한국당과의 통합선언은 무효라고 불쑥 선언했다. 통합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장 총장은 격분했다.

그는 통합합의서를 기자들에게 내보이면서 설명했다. ‘당 대 당 통합원칙’, ‘이종찬 의원의 공동대표 보장’, ‘당직 반분’, ‘당의 공당화(당 발전기금 2000억 원 조성)’, ‘당의 자산과 부채에 대한 정리’…. 정 대표가 직접 서명까지 한 문건이었다.

수세에 몰리자 정 대표는 바로 다음 날 “새한국당의 부채 청산을 위해 50억 원을 주었다”는 얘기를 흘렸다. 현금이 오고갔다는 충격적인 기사거리를 제공함으로써 큰불을 꺼보자는 속셈이었다.

나는 새한국당 회의석상에서 “합당 때 자산과 부채를 새로 합당된 당에 승계키로 한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장경우 사무총장에게 확인해보니 아직 부채청산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합당키로 한 뒤, 전국적인 선거운동을 위해 우리 조직을 가동하는 데 드는 비용은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은 부채청산 비용도 상당액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모두 합쳐봐야 50억 원이 안 되는 액수였지만 나 스스로를 속인 셈이었다.  
▼ “아니, 이선희가 마포랑 무슨 상관이야”, “강변가요제 출신… 마포도 강변이지요” ▼

‘시의원 가수’ 이선희에 관한 에피소드


1991년 6월 지방의회 선거 직후 당선 인사차 민자당사를 방문해 김영삼 대표를 만난 이선희. 그러나 이선희는 이듬해 9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종찬의 새한국당에 입당한다. 동아일보 DB
1991년 6월 지방의회 선거 직후 당선 인사차 민자당사를 방문해 김영삼 대표를 만난 이선희. 그러나 이선희는 이듬해 9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종찬의 새한국당에 입당한다. 동아일보 DB
‘이종찬 다이어리’의 1992년 11월 25일과 27일자를 보면 뭐랄까, ‘정치와 인심(人心)’이란 것을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대선 출마 포기 선언 이후 이종찬은 새한국당 동지들로부터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자기가 대통령후보를 하고 싶어 반(反) YS 진영의 ‘국민후보’ 추대 움직임을 물밑으로 방해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종찬은 안팎으로 위기였다.

여하튼 새한국당의 ‘국민후보’ 추대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이종찬은 11월 20일 일단 대통령 후보 등록을 마친다. 그리고 유세에 나섰으나 언론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때 가수 이선희가 입당했다. 이선희는 입당식에서 “가수 생활에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것을 각오하고 왔다”고 했다. 유세장이 달라졌다.

이종찬의 기억. “가는 곳마다 이선희 양은 대중을 동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 도와준다고 한 이상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선희 양이 나에게 베풀어준 그 정성을 나는 일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맡고 있을 때는 딸과 함께 원장 공관에도 자주 놀러왔다. 그 딸이 지금 미국 코넬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하던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외국에 나가서 한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귀국해 다시 무대에 서는 걸 보고 나와 아내는 무척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워서 먼발치에서 지켜볼 뿐이다.”

이선희가 ‘이종찬 지지’를 선언하며 새한국당에 입당할 때, 그녀는 서울시의원이었다. 1991년 6월, 유신 이후 처음 실시되는 기초 및 광역 지방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은 그녀를 서울 마포의 시의원 후보로 공천했다.

이선희를 영입한 사람이 바로 민자당 장경우 지방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 3당 합당의 여파로 민자당은 당시 후보 발굴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장경우 본부장=“아니 어떻게 후보 하나 못 냅니까? 정말 그렇게밖에 안 됩니까?”

박명환 마포지구당 위원장=“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데 난들 어떡합니까?”

그럴 때 이건상 총무국장이 ‘이선희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가장 뜨고 있는 젊은 가수였다.

장경우 본부장=“그렇다 해도 이선희가 마포와 무슨 상관이야?”

이건상 총무국장=“왜요? 강변가요제 출신이잖아요? 마포가 바로 강변지역 아닙니까?”(시사플러스 ‘장경우의 세상읽기’)

그렇게 발굴한 후보였지만, 이선희는 말 그대로 숨은 진주였다. 후보를 내지 못해 쩔쩔매던 YS의 민자당은 서울에서만 110 대 21로 당시 DJ의 신민주연합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국어대에서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충격적인 장면이 선거분위기 반전의 결정타였지만, 이선희 바람도 중요한 승인(勝因)이었다.

이선희가 새한국당에 입당한 지 이틀 뒤인 27일, 이종찬은 김우중을 찾아간다. 자금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김우중의 대답은 NO. 예상했지만 이종찬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언젠가 자네도 오늘처럼 초라한 나를 기억할 날이 있을 것이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정주영#합당#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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