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선착순 달리기에 내몰린 것 같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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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만에 새 장편 ‘저녁이 깊다’ 출간한 이혜경 작가
작가 또래들의 굴곡진 삶 담아

22일 만난 이혜경 작가는 나무에 등을 기대며 “참 편하다”고 했다. 50대의 작가는 “고교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수감자가 된 것 같아 무척 힘들었다. 그럴 때 학교 언덕 나무에 기대면 살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2일 만난 이혜경 작가는 나무에 등을 기대며 “참 편하다”고 했다. 50대의 작가는 “고교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수감자가 된 것 같아 무척 힘들었다. 그럴 때 학교 언덕 나무에 기대면 살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쭉쭉 밀고 나가야 하는데, 내 발을 내가 걸고 넘어져요. 중간쯤 가다가 다시 쓰죠. 퇴고도 오래 해요.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과잉된 것을 빼고. 그 과정을 너무 많이 왕복하죠.”

소설가 이혜경 씨(54)는 과작(寡作) 작가로 불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최근 새 장편소설 ‘저녁이 깊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이 소설도 2009년 8월부터 계간 ‘문학과 사회’에 ‘사금파리’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소설을 4년 동안 다시 고쳐서 내놓은 작품이다.

그는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 ‘우리들의 떨켜’로 등단해 13년 만인 1995년 첫 장편 ‘길 위의 집’을 출간했다. 이후 소설집 4권을 출간했지만 장편만 따지면 이번 소설은 19년 만이다. 그는 벼리고 벼린 소설만 출간했다. 그렇게 발표하는 소설은 수상의 영광을 안아 오늘의작가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탔다.

22일 서울 국회도서관 앞에서 만난 이 씨는 “운이 좋았고 복이 많았다. 평론가들이 작품을 좋게 봐주었는데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 씨는 소설에서 자신 또래의 평범한 사람을 그렸다. 1960년대 말 지방 소읍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인 기주, 지표, 병묵, 형태는 점차 어른으로 커가며 세상에서 견디어 살아남거나 끝내 좌절한다. 그들의 삶 속에 한국 사회의 경쟁, 불평등, 부의 대물림, 사건 사고 같은 문제들을 생생히 녹였다. 그리고 ‘살고 싶었던 삶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그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소설의 출발은 ‘선착순 달리기’였다. 그는 선착순 달리기 벌을 받을 때면 숨이 턱에 닿게 뛰고 또 뛰는 그룹에 속했다. 소설 속에는 벌을 받는 아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를 따돌리고 달리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선착순 달리기는 잘한 사람을 상 주고 못하는 사람을 보듬어 함께 가기보다 힘 있는 사람이 앞서 나가면 그걸 기준 삼아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하니’ 질책해요. 그 속에 ‘하면 된다’는 시대의 구호가 압축돼 있어요. 우리 사회가 삶은 편리해졌지만 바닥에 흐르는 본질은 선착순 달리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른한 살 직장인인 이 씨의 조카는 회사 모임에서 소설 한 구절을 동료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세상의 톱니와 내 톱니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게 선명해질 때가 있잖아.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럭저럭 굴러가긴 했는데 한순간 꼼짝 안 하는 때. 모터를 꺼버리자니 해야 할 일이 남았고, 억지로 가동시키자니 치명적인 고장이 날 것 같고. 이제 어쩐담, 싶어지는 때.”

동료들은 “내 이야기 같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꼭 물어봐 달라”고 조카에게 말했다. 이 씨가 답했다. “그걸 안다면 소설을 쓰고 있을까요.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지요.”

이 씨는 미안한 듯 답했지만 그의 소설은 독자들을 보듬어 주고 있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저녁이 깊다#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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