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전승민]인공지능이라는 단어의 무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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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얼마 전 평소 친분이 있는 인공지능(AI) 분야 교수 한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해 왔다. 4일(현지 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에서 “57명의 해외 과학자가 KAIST와 어떤 공동연구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를 알고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이 뉴스는 밤사이 일어났던 뉴스를 체크하며 기자도 이미 살펴봤던 것이다. 그때는 ‘오해 같은데 해명을 하면 되는 일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해 왔던 교수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이번 일은 신용과 관련된 것이므로 허투루 넘겨선 안 된다”고 했다.

물론 이들의 보이콧 선언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사태의 발단은 이랬다. 한 영문매체가 올해 2월 ‘KAIST-한화시스템 국방인공지능융합연구센터’ 개소 사실을 전하면서 ‘AI 무기를 개발하는 곳’이라는 해설을 달았고, 이를 본 외국 과학자들은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KAIST도 대응에 나섰다. 신성철 총장이 57명 전원에게 ‘인간을 공격하는 무기를 개발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반박 e메일을 보냈고, 국내 언론을 대상으로도 설명 자료를 냈다. 결국 그들을 대표하는 토비 월시 뉴사우스웨일스대 교수가 “오해가 풀렸고 KAIST와 다시 협력할 수 있게 돼 반갑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도대체 왜 이런 오해를 받았는지는 짚어볼 문제다. 단순히 기사 하나를 보고 많은 과학자들이 집단행동을 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먼저 국제적으로 국내 AI 연구에 대한 의혹이 컸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이미 ‘전과자’ 취급을 받는다. 무기를 개발할 때 사격 결정을 기계장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을 대단한 금기로 여긴다. 그런데 한화시스템과 같은 그룹 계열사인 한화테크윈(구 삼성테크윈)은 자동으로 판단하고 사격할 수 있는 경계로봇을 실제로 개발한 바 있다. 이는 ‘대표적 킬러로봇 개발 사례’로 아직도 관련 학회에서 빠짐없이 거론된다. 이런 한화가 KAIST와 손잡고 ‘국방+AI’를 융합하는 연구를 하겠다니, 해외 과학자들이 보기엔 적잖이 우려됐을 것이다.

국내에서 AI라는 단어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국가 연구개발투자도 여기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그러니 국내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과제에 너도나도 ‘AI’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가져다 붙인다. 정부연구과제 선정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해지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런 무분별한 단어선별이 쌓이면 국내 연구계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국방인공지능융합연구센터의 이름을 ‘국방기술융합연구센터’ 정도로 지었다면 과연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을까.

기술적으로도 완벽한 AI 개발은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미지의 영역이다. 이런 단어를 움직이는 기계장치, 그것도 국방기술에 가져다 붙이려면 그만한 당위성과 고민이 꼭 필요하다.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국내 연구계의 신뢰는 점점 더 낮아질 것이다.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수석기자 enhance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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