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 자초한 靑이나… 소통 거부한 민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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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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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FTA처리 요청하러 국회 갈것” 일방 통보“오바마 만나 답 얻어오기 전엔 오지말라” 퇴짜… 어제 방문하려다 15일로 연기

불통(不通)과 반목(反目)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의 ‘민낯’이 11일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하려다 민주당의 반대로 취소했다. 방문 계획 공개도, 계획 취소도 전격적이었다. 청와대도, 민주당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양측은 오로지 한미 FTA 처리의 주도권을 놓고 ‘명분 쌓기’에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 계획은 오전 8시 20분 공식 발표됐다가 3시간여 만에 이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이후인 15일로 연기됐다. 대통령의 일정이 급변한 이날 ‘사건’은 한국 정치가 최소한의 사전 조율 능력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의 거부에도 “낮은 자세로 기다리겠다”며 국회 방문을 밀어붙이려다가 박희태 국회의장이 난색을 표하며 15일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자 물러섰다. 정치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소통하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일방통행의 이미지가 더 굳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통령에게 ‘불통 대통령’이라고 비판해온 민주당도 ‘소통’을 부인함으로써 그간의 비판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줬다.

▼ 대통령은 “野 거부해도 국회 가겠다” 야당은 “와도 안 만난다”…
뒤늦게 손 내민 靑, 고개돌린 野… 15일 MB 헛걸음할 수도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방문은 15일로 미뤄졌지만 성사 여부는 불투명해 보인다. 한종태 국회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가 ‘15일 대통령을 맞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으나 민주당의 주장은 전혀 달랐다.

평행선 정치 이명박 대통령이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왼쪽).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1일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손깍지를 낀 채 뭔가 골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협조를 구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하려 했지만 민주당은 거부했다. 청와대와 여야는 물밑 조율을 거쳐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15일로
 연기했다.
평행선 정치 이명박 대통령이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왼쪽).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11일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손깍지를 낀 채 뭔가 골몰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협조를 구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하려 했지만 민주당은 거부했다. 청와대와 여야는 물밑 조율을 거쳐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15일로 연기했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이 대통령이 (12, 13일 하와이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미 FTA와 관련한 새로운 제안을 가져온다면 (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지만 상황이 똑같다면 면담할 필요가 없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 ‘의전도 예의도 잃은’ 한국 정치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 계획은 지난달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야당인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나는 반대표를 던졌다”면서도 한미 FTA 통과를 축하했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풍경이 의회 민주주의의 전형이라고 느꼈다며 자신이 직접 국회를 설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달랐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거부하며 “사전 조율 없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국회를 방문하는 것은 국가원수의 기본적인 의전도 아니고, 야당과 국회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사전에 협의할 내용을 충분히 조율하지 않으면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직접 국회 연설을 하려 했을 때도 민주당은 “한미 FTA 통과를 압박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고 반대해 무산시켰다. 손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달 18일 이 대통령이 국회 부의장단과 교섭단체 원내대표 등 국회 지도부를 초청한 청와대 오찬 간담회에도 불참했다.

여권의 체면도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김효재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여러 차례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이 ‘낮은 자세’를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했지만 사전에 대통령의 뜻을 민주당에 전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아 “오만하다”는 반응과 함께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을 낳았다.

청와대 정무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매듭을 풀어보려던 이 대통령으로서는 오히려 APEC 정상회의에서 뭔가의 ‘선물’을 가져와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 ‘꽉 막힌’ 한미 FTA 처리 더 꼬이나

여야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 계획이 불발되면서 한미 FTA 처리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장 민주당의 면담 거부를 명분으로 한나라당 내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대통령과의 면담도 거부한 야당과 과연 협상이 가능하겠느냐는 비판이 터져 나올 수 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대통령이 15일로 연기를 해서라도 국회를 찾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민주당 관계자도 “대통령이 국회를 찾는 것은 강행 처리를 하기 위한 명분 축적용”이라고 분석했다. 다음 주 강공으로든, 협상으로든 한미 FTA가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당의 대표적 협상파인 한나라당 황우여,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주말 막바지 협상에 나설 계획이다. 여야 의원 8명이 10일 “강행 처리와 몸싸움 저지 모두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강경파에 맞선 양당의 협상파도 세 불리기에 들어갔다.

결국 이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하겠다고 밝힌 15일이 한미 FTA의 처리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공산이 크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벤치마킹?’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식이나 취임 첫해 정기국회 시정연설 등을 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이 대통령도 지금까지 4차례 국회를 방문했다. 하지만 공식행사가 아닌 긴급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한 사례는 드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1월 8일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다. 불발은 됐지만 이 대통령의 국회 방문 시도는 노 전 대통령의 행보를 ‘벤치마킹’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국회 방문은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의 요청으로 박관용 국회의장이 각 당 대표에게 연락하면서 성사됐다. 박 의장은 의장실 앞에서 한나라당 최병렬, 민주당 조순형 대표, 열린우리당 김원기 공동의장 등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맞으며 “시정연설 등이 아닌 일로 국회를 찾은 최초의 대통령이다. 헌정사에 특별한 일로 아주 좋은 기록이다”라고 평가했다.

한-칠레 FTA 비준동의안은 그해 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34명 중 찬성 162표, 반대 71표, 기권 1표로 통과됐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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