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 백두산 장군봉 등반의 추억[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9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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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 2일 북측 백두산 장군봉에서 찍은 천지.
2002년 7월 2일 북측 백두산 장군봉에서 찍은 천지.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틀째인 19일 오전 채널A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문재인 대통령의 백두산 등정 가능성을 놓고 다른 출연자들과 즐거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당시까지의 모든 의전이 남측 인사들에게 할 수 있는 북한의 최고 의전이라는 점을 근거로, 김정은 위원장이 마지막 특급 의전인 ‘백두산 장군봉 등정’카드를 꺼내 들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다른 출연자들은 경호 등 사전준비의 문제를 들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반론을 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숙명여대 홍규덕 교수님의 초대로 ‘생활속의 북한 알기’ 수업에 초대돼 북한 변방 지역의 문제점과 지원방안을 논의하던 중 문 대통령의 20일 백두산 등반 결정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망이 맞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침 돌직구쇼에서도 지적했듯이 남한 대통령의 백두산 등정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김씨 일가 신화의 핵심에 있는 산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민족의 성산이라고 부르는 백두산은 ‘백두혈통’의 정신적 발원지이자 정통성의 근원으로 숭앙됩니다. 장군봉은 빨치산 국가의 수령을 상징하는 봉우리이고 백두산 밀영에는 김정일의 탄생지라고 북측이 주장하는(실제 탄생지는 러시아) 고향집이 있습니다. 장군봉 위에서 천지를 바라보며 두 정상이 손을 잡은 모습은 국제사회에는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의 이미지로 비쳐지겠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대대적인 체제 홍보 수단으로 활용될 듯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헌법상 우리의 영토인 백두산을 시찰하는 것으로 보면 문제가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도 백두산 등반에 얽힌 추억이 있습니다. 16년 전 처음 평양을 방문했던 2002년 7월을 비롯해 네 차례 북측 백두산을 등반했습니다. 그리고 북측 안내원들에게 “이 좋은 자연환경을 외국인들에게 개방해 외화를 벌어들이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북한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개마고원 트레킹과 백두산 등반을 달러벌이용 관관상품으로 팔기 시작했다는 외신을 보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게 될 북측 백두산 등반은 어떤 경험일까. 여기서는 16년 전 경험을 적었던 월간 <신동아> 2002년 9월호 기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아직 북한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7년차 젊은 기자의 다소 낭만적인 기록이라는 점을 양해해 주실 것으로 믿으면서.

필자(맨 왼쪽)가 장군봉 위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북측 안내원과 남측 인도직 지원단체 회원들을 취재하고 있다.
필자(맨 왼쪽)가 장군봉 위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북측 안내원과 남측 인도직 지원단체 회원들을 취재하고 있다.


7월 2일 화요일 오전 11시 반 천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한측 백두산 장군봉 정상. 1950년 고향인 함흥을 떠나 남하한 뒤 북녘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김설봉옹의 넋을 달래기 위해 작은 기도회가 열렸다.

열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아들 남국(64·범아보험대행 이사)씨가 아버지의 영정을 꺼내들었다. 그 옆에 남국씨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최기서(63·전 한보주택 사장)씨가 섰다. 최재화(51·성남제일교회)목사의 기도가 시작됐다.

“지난해 당신의 품에 안긴 어린 양이 이제 아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 살아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었습니다. 더 이상 이들과 같은 안타까운 이산의 한이 없도록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내려주시옵소서….”

남국씨는 눈을 감고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기도가 끝나자 기서씨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는 “내 친구는 효잡니다. 저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라며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아버지도 북녘 땅을 그리다 세상을 버렸다.

김남국씨와 최기서씨는 각기 아버지가 생전에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정부에 낸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번번이 기각됐다.

두 아버지가 떠난 뒤 두 아들이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북한측 민족화해협의회가 한국이웃사랑회의 대규모 방북단 입국을 허용한 것. 방북 목적은 1997년부터 이웃사랑회가 지원하고 있는 목장 5곳, 육아원 14곳, 병원 한 곳 가운데 목장과 병원을 방문해 지원한 물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두 친구는 이웃사랑회와 함께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원 자격으로 이웃사랑회와 함께 고향 땅을 밟았다. 기도를 마친 남국씨는 백두산 장군봉 어딘가에 아버지의 유품 하나를 묻었다. 그것을 통해 백두산 천지의 기운을 받아 하늘에서도 늘 건강하시라고.

북한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대표단은 북한에 입국하기 전부터 몹시 흥분했다. 남국씨와 기서씨와 같은 실향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남국씨는 6월28일 인천국제공항에서부터 “이웃사랑회 같은 민간단체도 실향민들이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안북도 철산이 고향인 김용상(62) 원주제일교회 목사도 “그저 실향민들에게 고향에 다녀오시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물론 이산가족 상봉은 현재로서는 민간단체들이 할 수 없는 일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에 들어가기 전 실향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우세근(48) 의정부신촌교회 목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을 기억한다.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인 자신을 불러 두 시간 동안이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향 마을 어귀에는 밤나무가 있고 우리 집 옆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었단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장손의 기억에 고향을 심어준 할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아무도 모르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중략)

대표단 방북 일정의 절정은 7월2일 백두산 등정. 북한에서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다. 오전 8시50분경 비행기가 삼지연공항을 향해 고도를 낮추자 운해를 뚫고 장백의 거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행은 원시림이 빼곡히 들어찬 백두고원의 웅장함에 매료됐다.

9시 정각. 비행기가 해발 1400m인 삼지연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다리고 있던 버스 3대가 일행을 나눠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키가 1m 남짓한 침엽수가 길 양옆에 들어차 마치 끝없는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9시46분. 해설원과 관리인이라며 인민군복 차림을 한 20대 여성과 30대 남성이 선도차에 올랐다. 여성 해설원은 “참 좋은 날씨에 오셨습니다. 아침에는 비가 왔는데”라며 일행을 반겼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설원의 백두산 자랑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게 될 북측 백두산 부감도.
문재인 대통령이 오르게 될 북측 백두산 부감도.
“백두산은 정확히 해발 2750m입니다. 북한주민과 해외동포 등을 합해 한해 10만명이 다녀갑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눈 위를 걷다가 신발을 잊어버리면 봄에 신발이 나무 위에 걸려있습니다.”

10시7분.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 고도인 해발 2000m를 넘으면서 비로봉과 장군봉이 지척에 나타났다. 자동차가 장군봉 바로 아래까지 오를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었다.

10시35분. 장군봉 바로 아래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의 입에서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천지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일행은 허겁지겁 짝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10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구름이 몰려오더니 천지를 삼켜버렸다.

막간을 이용한다며 해설원이 백두산과 천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백두산에 화산이 분출한 것은 100만년 전인데 마지막 분출은 1898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116~67년 사이의 분출이 지금의 분화구를 형성했습니다.”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탐사를 왔다가 겁만 먹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1981년 무게가 500kg이나 되는 곰이 내려와 괴물소동이 빚어진 이야기, 1984년에 산천어가 방류돼 살기 시작한 이야기, 하루에 열두 번이나 변해 시집 못간 노처녀에 비유된다는 날씨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11시반이 되도록 해설원의 구성진 백두산 자랑이 이어졌지만 천지를 삼킨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일행은 그래도 즐거운 듯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백두산 밀영에 있는 ‘고향집’ 앞을 흐르는 이른바 ‘이화수’를 즐기고 있다.
백두산 밀영에 있는 ‘고향집’ 앞을 흐르는 이른바 ‘이화수’를 즐기고 있다.
남국씨의 ‘작은 기도회’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대표단 전체의 기도회가 시작됐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을 기원하는 모두의 마음이 모아졌다. 기도가 끝나자 누가 선창했다고 할 것도 없이 모두의 입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화답해 북한 안내원과 여성 해설원들이 ‘우리는 하나’를 부르면서 일행은 서로 어깨를 결어 하나가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일행은 12시반경 장군봉에서 내려와 백두고원 위에 자리를 폈다. 가까이 백두산 고봉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넓게 펼쳐진 풀밭에 앉아서 먹는 김밥 도시락의 맛은 그 어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을 듯하다.

기자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이 즐거움이 머지않아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 되기를.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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