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줄기전에 퇴직금 챙기자”… 중간정산 분쟁 벌써 시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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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2시간 태풍이 온다]<2> ‘퇴직금 폭탄’에 떠는 기업들

대전의 한 300인 이상 제조업체에서 생산직으로 근무 중인 A 씨(47)는 지금까지 주당 68시간 이상 일했다. 주 52시간제가 다음 달 1일부터 시행되면 특근을 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매달 35만∼40만 원 정도 수당이 줄어든다.

A 씨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퇴직금 중간정산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에 중간정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사측은 “노조가 없어 누구와 합의를 해야 하는지 모호하고, 사용자단체에서 해당 시행령(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에 대한 위헌법률 심판을 신청할 예정이라 중간정산을 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A 씨는 “정부가 해주라는데도 버티는 회사를 이해할 수 없다”며 “사업주를 노동청에 신고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퇴직금 중간정산 분쟁 이미 현실화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으로 임금이 줄어들면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퇴직금 분쟁’이 곳곳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다음 달 1일부터 근로시간 특례가 폐지돼 주 68시간제가 시행되는 버스업계가 대표적이다.

시외버스업체인 강원여객은 최근 한 달 만에 30명이 넘는 운전사가 사직서를 냈다. 근로시간 단축 전에 미리 퇴직금을 받기 위한 장기근속자가 대부분이다. 근로시간 단축을 앞둔 버스업계가 인력난에 시달리는 만큼 퇴직금을 손해 보지 않도록 미리 퇴직금을 받고, 조건이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의도다. 정판형 강원버스노조 부장은 “정부는 임금을 보전해주겠다고 하지만 막상 사측에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당연히 근로자 입장에선 퇴직금 손실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버스업계의 사정도 비슷하다. 경기 고양시 명성운수의 한 운전사는 “퇴직금을 미리 받고 이직하겠다며 다른 회사에 지원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직원이 많다”고 했다. 성병찬 경북자동차노조 사무국장은 “우리 지역도 퇴직금을 미리 타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퇴직금은 불안한 노후를 대비한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여서 근로자로선 몇백만 원의 손실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형 건설사에서 현장감독 업무를 하는 신모 씨(49)는 “신축이 한창일 땐 주말에도 오전 6시 반부터 오후 9시까지 일했다”며 “앞으로 오후 7시 ‘칼퇴근’이 정착되면 퇴직금이 확 깎일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중견기업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윤모 씨(38)는 “바쁜 시기엔 휴일도 없이 일했는데 앞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퇴직금이 2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상돼 중간정산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기업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퇴직금 중간정산’ 삼중고

기업 입장에선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른 상황에서 근로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퇴직금 중간정산 폭탄까지 떠안게 되는 ‘삼중고’를 겪을 수 있다. 퇴직금 중간정산이 노사 갈등의 핵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과장된 우려’라고 일축한다. 퇴직금 중간정산은 기업의 의무가 아니어서 중간정산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성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노조가 중간정산을 강하게 요구하며 강경투쟁에 나선다면 중간정산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퇴직금 중간정산보다 노사분규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면 퇴직금 중간정산을 노조와의 ‘협상카드’로 쓰는 사업장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한 노무법인 관계자는 “퇴직금 중간정산 문의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지고 있다”며 “정부의 상황 인식이 안일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퇴직금 폭탄을 피하려면 근본적으로 퇴직연금 도입률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퇴직연금은 퇴직금과 달리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간정산이 허용되지 않는다. 특히 퇴직연금은 기업이 도산해도 근로자가 받을 수 있으며 기업 입장에서도 퇴직금을 한꺼번에 지급하는 부담을 덜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업이 매월 일정액을 금융기관에 맡기면 금융기관이 이를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해 운용하고, 근로자는 퇴직 후 연금으로 수령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퇴직연금은 2016년부터 30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의무화됐고, 2022년까지 기업 규모에 맞춰 단계적으로 의무화된다. 하지만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운영하는 사업장이 퇴직연금을 도입하려면 노조 또는 근로자 동의를 거쳐야 한다. 미가입 시 제재 조항은 없어 현재 국내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50%에 그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기업 규모가 영세할수록 기존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운영하는 사업장이 많다는 점이다. 대기업들은 퇴직연금제를 운영하고 있어 문제가 없지만 중소기업들은 퇴직금 중산정산 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퇴직금을 중간정산한 근로자가 이번 기회에 퇴직연금으로 갈아탈 수 있도록 정부가 유인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열 ryu@donga.com·강성휘·김하경 기자

#주 52시간제#퇴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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