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운명이 문을 두드릴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게으른 학생이 위대한 과학자로… 호킹을 바꾼 불치병 시한부선고
내리막길 MS, 구원등판 사티아… ‘새로 고침’ 전략으로 혁신 성공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개헌 등… 파국 혹은 도약의 결정적 순간에서 선택기준은 ‘어떤 미래에 살 것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여동생은 4세 때 책을 읽었는데 그는 8세가 돼서야 글을 터득했다. 학창시절에는 게으른 학생이었고 성적은 늘 반에서 중간 이하였다. 어찌어찌 명문대 입학은 했는데 행운은 거기까지. 21세에 중병에 걸려 ‘길어야 2, 3년’이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인생역전은 그때부터. “왜 내게 이런 일이…”라고 한탄하는 좌절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때 이른 최후통첩에 남은 시간은 온전히 충실히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55년을 더 살면서 슈퍼스타급 인기를 누린다.

지난주 76세의 나이로 타계한 스티븐 호킹 박사 얘기다. 의학계에 따르면 그가 요절하기는커녕 루게릭병 증세가 극도로 악화된 뒤에도 단순 연명이 아니라 위대한 물리학자로서 생애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지속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내 최대 업적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었다. 호킹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고 천재 과학자로 갱생의 길을 걷게 한 일등공신은 역설적으로, 평생 그를 옭아맨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였다는 말이 나온다.

베토벤 교향곡 ‘운명’의 도입부처럼 거세게 휘몰아친 운명을 직시하면서 그의 생에는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다. ‘결정적 순간’―사진미학의 거장인 프랑스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세계를 압축한 단어인데, 그가 포착한 것은 평범한 찰나가 아니라, 대상의 ‘본질’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음을 뜻한다.

호킹에게 ‘결정적 순간’은 새파란 청년이 시한부 선고를 받던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막다른 상황에 부딪혔을 때,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정신으로 맞선 호킹, 그 덕분에 인류는 우주의 탄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면서 현대물리학의 역사도 바꾼 것이다.

호킹과 마찬가지로 “왜 이런 일이 나에게…”라 절규했던 또 한 남자는 자신의 운명적 상황을 경영철학에 반영해 내리막길의 기업을 구해냈다. 빌 게이츠, 스티브 발머에 이어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사티아 나델라의 얘기다. 최근 출간된 ‘히트 리프레시’에 따르면 인도 출신 엔지니어였던 나델라는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의 가치를 깨닫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쇠약해진 정보기술(IT) 공룡을 혁신하는 여정에서 ‘먼저, 사람 시장 미래에 공감하라’는 원칙을 제시해 조직을 쇄신했다.

실제로 그는 내부 반발에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가끔은 옛 경쟁자에게 겨눴던 칼을 거두고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구글, 애플과도 손잡았다. 책 제목의 리프레시는 키보드의 F5, 즉 ‘새로 고침’ 기능을 뜻한다.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면서 혁신을 추구한 것이 그의 성공 비결이었다.

개인과 기업뿐 아니라 나라에도 ‘새로 고침’이 절박한 순간이 찾아온다. 어쩌면 지금 한반도가 그런 때인지 모른다. 북핵 게임의 마지막 해법이 될지도 모를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미래 한국의 큰 그림을 그려내는 개헌까지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름할 선택의 순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그뿐인가. 중국에 ‘시 황제’, 러시아에 ‘차르 푸틴’이 등장해 불확실성은 한층 커졌다. 한 치 앞을 종잡기 어려운 현실, 오늘 내딛는 한발 한발에 한없이 막중한 책무가 얹혀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긴장감 절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니다. 6월 지방선거 등 눈앞의 작은 이해득실에 매달려 집안다툼에 다들 급급하다.

그제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청년실업을 ‘회색코뿔소(Grey Rhino)처럼 큰 위기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본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도 청년일자리와 저출산 문제를 회색코뿔소로 지목했었다. 회색코뿔소란, 다들 예측할 수 있는 위기로 파급력이 엄청난데도 간과하는 위험을 뜻한다. 여기저기서 회색코뿔소가 떼로 몰려들어 한국 사회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중인가.

비핵화도 개헌도, 한번 과녁을 빗나간 것은 다시 돌이키기 힘들다. 지금 한 치의 오차가 세월 가며 천길만길의 차이로 증폭될지 모른다. 낭떠러지 끝,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헤쳐 가는 첫걸음은 본질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 하나가 있다. 우리가 어떤 미래에 살아갈 것인지 떠올리는 것이다. 자식 세대와 그 뒤를 이은 후손이 살아갈 세상을 더 멀리, 더 긴 안목으로 내다보며 이 땅의 미래를 만드는 일. 지금 우리 손에 달렸다. 파국인가 도약인가, 훗날 돌아보면 지금이 결정적 순간이 되어 있을지 누가 아는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스티븐 호킹 박사#루게릭병#현대물리학#사티아 나델라#히트 리프레시#남북 정상회담#북미 정상회담#회색코뿔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