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정치’가 훼손한 국보 암각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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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훼손한 반구대 암각화]평가위원이 전한 ‘임시 물막이 강행’
보존 실험에 28억 혈세 쓴 물막이 사업 중단… 3년간 무슨 일이
당시 문화재청장-기술검증위원 등 “전문가들 실현불가 의견 묵살하고
靑-국무조정실-지역의원 밀어붙여” 검증실험 모두 실패… 훼손만 심화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침수 훼손을 막기 위해 고안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조감도. 동아일보DB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침수 훼손을 막기 위해 고안된 ‘가변형 임시 물막이’ 조감도. 동아일보DB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모형 검증실험에 청와대와 정치권이 개입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묵살된 사실이 확인됐다.

정치논리로 추진된 3년간의 임시 물막이 실험이 최종 실패로 끝나면서 암각화 보존 시기를 놓친 채 28억 원의 국민 혈세만 낭비하게 됐다.

임시 물막이 사업 추진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변영섭 고려대 교수(고고미술사학)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임시 물막이가 과학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며 “하지만 당시 국무조정실이 물막이 설치를 강하게 추진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국무조정실뿐 아니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이 암각화 대책을 막후 지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압박도 작용했다. 임시 물막이 기술검증평가단의 한 위원은 “모형 실험이 결정된 지난해 3월 4일 평가단 회의가 열리기 직전 울산을 지역구로 둔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실험 착수에 동의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2014년 평가단 구성 초기부터 수리(水理) 전문가들이 임시 물막이는 비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의견을 꾸준히 제시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해 말부터 올 5월까지 진행된 세 차례의 모형 검증실험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달 21일 문화재위원회는 사업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임시 물막이 사업은 1965년 사연댐 설치 이후 암각화의 침수 훼손을 막기 위해 길이 55m, 너비 18m(암각화로부터 거리 포함), 높이 16m의 거대한 투명판을 세우려던 계획이다. 그러나 물막이 투명판의 이음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사업이 전면 취소됐다.

3년간 허송세월을 하면서 그사이 암각화의 훼손은 더 심해졌다. 이미 7년 전 문화재청 자체 조사에서 암각화의 풍화단계는 6단계 중 5단계인 ‘흙 상태 진입 직전’까지 간 상황이다.
 

▼ 평가단이 이의 제기하자… 문화재청 “총리실서 내려온 사안” ▼


28억 원의 혈세만 낭비하고 3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간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은 정부와 정치권이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추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무 기관인 문화재청과 울산시는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반대 의견에도 정치권의 눈치만 살핀 ‘영혼 없는 행정’으로 비판받고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임시 물막이 기술검증평가단’의 한 위원은 2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내가 여기 왜 있나’ 싶을 정도로 학자로서 자괴감이 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반구대 암각화 사태는 정치가 개입해 문화재를 망친 대표 사례”라고도 했다. 기술검증평가단은 수리(水理) 토목 건축 기계 분야 전문가 14명으로 구성된 민간위원회로 임시 물막이 검증실험의 모든 과정을 평가 감독했다.

평가단 위원들에 따르면 2013년 6월 국무조정실과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울산시가 ‘임시 물막이 사업 추진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 전부터 전문가들은 임시 물막이의 기술적인 문제점을 문화재청과 울산시에 알렸다. 한 위원은 “2013년 5월 문화재청이 자체 구성한 전문가 자문단 회의에서 ‘구조물의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절대 불가능한 방안’이라는 의견을 수차례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최종 실험에서 확인된 이음매 누수(漏水) 현상은 수차례 경고된 사항이었다. 평가단 위원은 “2013년 5월 전문가 회의에서 ‘구조물의 누수가 우려된다. 어떻게 해결할 거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당시 임시 물막이를 제안한 함인선 포스코A&C 기술고문이 ‘누수가 심하지 않을 것 같으니 철판 등으로 막으면 된다’고 답해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함 고문의 기술제안서 자체가 허점투성이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평가단 관계자는 “제안서를 훑어보니 기초 계산조차 틀린 ‘부실 보고서’였다”며 “함 고문이 수리 전문가가 아닌 건축가 출신이다 보니 부력(浮力)의 원리도 모르는 설계가 담겨 있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전에 임시 물막이 실험의 문제를 충분히 인지한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MOU 체결에 나선 이유는 뭘까. 평가단 위원은 “MOU 체결 후 재차 문제를 지적하자 문화재청 담당자가 ‘총리실에서 내려온 사안을 우리가 어떻게 거부하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국무조정실이 물막이 설치를 강하게 추진했다”며 “결정 이후 암각화 주변에서 공룡 발자국 81개가 발견됐지만 물막이 설치를 강행하는 분위기에서 확대 발굴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 MOU 체결 직전인 2013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발언한 직후 문화재청은 기존 ‘사연댐 수위 조절안’을 포기하고 임시 물막이 사업을 추진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모철민 대통령교육문화수석이 암각화 대책을 꼼꼼히 챙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한 평가단 위원은 “새누리당 소속 울산 지역구 국회의원이 지난해 3월 4일 최종회의 직전 전화를 걸어와 ‘운문댐을 통한 대체 식수원을 확보할 때까지 2, 3년만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검증실험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일부 평가단 위원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은 이런 압력이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댐 구조 전문가의 자문서를 붙이는 조건으로 검증실험이 결정됐지만, 끝내 자문서는 평가단에 제출되지 않았다. 임시 물막이의 실효성을 인정하는 수리 전문가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평가단 위원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평가단 위원은 “임시 물막이 기술 검증부터 입찰 심의까지 모든 과정이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진행됐다”며 “황금 같은 시간과 세금을 낭비했지만 책임지는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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