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말 ‘차지철 장막’에 갇혀 국민 탓하며 직언에 귀 막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아버지의 실패는 타산지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엔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하고 참모들의 직언도 적극 수용했다. 그러나 10월 유신으로 민심이 이반되고 차지철 경호실장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박 전 대통령도 주변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

○ 특별보좌관들을 외부 소통 창구로


1969년 박 전 대통령은 당시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특별보좌관 구성을 지시했다. “가급적 대가(大家)보다는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는 젊은 교수 중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 대학, 출신 안배도 고려해 인선을 해보라”고 했다는 것. 김 실장은 두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외교 국방 경제 사회 교육 등 각 분야 최고 인재를 뽑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신 대통령 직속으로 별도의 위원회는 두지 않았다. 그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특보에게 사실상 ‘1인 위원회’ 역할을 맡겼다. 비서실장이 행정적 지원은 했지만 비서실과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특보들은 해당 분야의 학계, 언론계 등의 여론을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박 전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방향을 시중에 전파하는 역할도 했다. 특보들은 신청만 하면 언제든지 박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특보로 젊은 교수 아니면 내각 수장을 이미 지낸 이들을 주로 임명했다고 한다.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을 만한 인물들을 일부러 고른 것이다. 특보가 장관직을 노리고 현 장관에 대한 약점을 찾아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대선 때 이주영 특보단장 밑에 국방안보, 통일외교, 여성, 일자리, 벤처 등 각 분야 전문가들로 특보 1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은 공약에 대한 의견을 당선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 당선인은 취임 이후 소수의 특보를 임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 박정희, 임기 막판 직언에 귀 닫아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10월 비서실장에 취임한 김정렴 실장에게서 청와대 비서실 축소 건의를 받고 “실장 소신대로 해”라며 흔쾌히 힘을 실어줬다. 1970년대 초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이 “각하, 학생을 더 잡아넣으면 계속 악순환이 될 것 같은데 좀 풀어주시죠”라고 말하자, 박 전 대통령이 “그래, 아직도 많이들 잡고 있나. 그거 풀어줘”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의 장막에 둘러싸여 제대로 민심과 소통하지 못했고 측근들의 직언에 귀를 닫았다는 게 당시 측근들의 공통된 얘기다. 당시 차 실장은 교수나 주요 여론 지도층과의 식사 자리를 주선해 거기에 박 전 대통령을 합석시키면서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차 실장은 매주 금요일 서울 경복궁 연병장에서 전투 장갑차, 대포까지 동원해 화려한 국기하강식을 열었다. 이 행사에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과 재벌 총수까지 불러 배석시키고 30경비단 군인들로부터 경례를 받으며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박승규 민정수석이 박 전 대통령을 찾아가 “수개월째 차 실장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세간에 말들이 많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이 “당장 집어치우고 못하게 하라”고 해 중단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박 전 대통령도 심리가 불안정한 상태였다. 차 실장의 문제를 지적해도 짜증을 내는 횟수가 늘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는 사람도 줄어들었다. 차 실장은 경호를 이유로 직언할 만한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의 곁에 가는 것을 차단했다.

특히 선거를 치를수록 지지율이 떨어지고, 1977년 부가가치세 도입 이후 국민들의 큰 저항에 부딪히자 박 전 대통령은 “국민들 밥 좀 먹고 살게 해 놓았더니 이것도 이해 못하나”라고 국민을 탓하며 귀를 닫았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박정희#유신말#박근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