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등장 회회아비, 이슬람인 국내 정착과정 보여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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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교수 ‘고려 귀화 외국인’ 논문

24일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의 ‘한국사 속의 외래인, 이주와 삶’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시준 원장(앞줄 가운데 뒷짐 진 사람)과 학자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제공
24일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의 ‘한국사 속의 외래인, 이주와 삶’ 학술회의에 참가한 한시준 원장(앞줄 가운데 뒷짐 진 사람)과 학자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제공
 중국이나 몽골은 물론이고 멀리 이슬람권에서 건너온 외국인들이 고려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쌍화점 같은 고려가요에 이들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개방적인 고려의 다양성이 여러 지역에서 온 외국인들의 이주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김철웅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최근 개최한 ‘한국사 속의 외래인, 이주와 삶’ 학술회의에서 ‘고려시대 외국인의 이주와 정착’ 논문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역사학계가 잘 다루지 않은 고려 귀화 외국인들의 삶을 파헤쳤다.

 논문에 따르면 10세기 고려 전기에만 여진족은 480회, 송나라 사람은 200회 이상 한반도를 왕래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고려와 송나라는 200년에 걸쳐 총 90차례(고려→송 60차례, 송→고려 30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는데, 송나라 상인이 고려에 입국한 횟수는 이보다 많은 130차례에 달했다. 양국의 공식 외교관계보다 사무역의 빈도가 훨씬 높았던 셈이다. 이에 따라 고려로 귀화한 송나라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의 출신지나 신분에 따라 고려왕조의 처우와 태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사(文士)나 의료인 등 송나라 지식인들에게 고려는 집과 여인을 제공하며 귀화를 적극 유도했다. 이들의 전문성과 기술을 국가 통치에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고려사에는 서필이라는 관료가 “귀화 한인(漢人)들에게 집을 잃은 신하들이 많다”며 광종에게 항의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향수병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는 송나라 사람들의 귀국을 왕이 나서 막기도 했다. 고려에 주저앉은 중국인들은 고려인과 혼인해 가정을 이뤘는데 고려속요 ‘예성강곡’은 귀화한 송나라 상인과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반면 거란이나 여진족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큰 집단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내륙이 아닌 북쪽 변방에 우선 배치하는 규제 방식을 취했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거란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요나라에서 피신한 거란인이 계속 늘고 농업 생산력을 높여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거란족의 내륙 거주도 허용했다.

 몽골인과 이슬람교도들의 고려 이주는 송나라와 달리 원나라의 고려 지배에 따른 강요로 시작됐다. 고려후기 제주도로 들어가 말을 키운 몽골인을 지칭한 달달목호(達達牧胡)가 대표적이다. 몽골은 삼별초 토벌을 내걸고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은 뒤 총독(다루가치)을 파견했다. 이들은 군사 목적에서 몽골 말 160필을 제주도로 들여와 키웠다.

 원나라의 제국 확장에 기여해 몽골인 다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한 이슬람교도(색목인)들도 고려로 들어와 일부는 평양부윤이나 장군이 됐다. 고려가요 쌍화점 중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라는 가사는 이슬람교도의 고려 정착을 보여준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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