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0 대 88 치욕 갚는다… 굶주린 야수들의 함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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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의 월드컵 본선, 미식축구 국가대표

한국 미식축구 대표팀이 대구 경북대 운동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훈련하고 있다. 7월 미국에서 열리는 제5회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 출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이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은 8년 만이다. 대표팀 선수들은 “미식축구는 축구와 농구, 격투기의 장점을 결합한 지상 최고의 스포츠”라고 말했다. 대구=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한국 미식축구 대표팀이 대구 경북대 운동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훈련하고 있다. 7월 미국에서 열리는 제5회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 출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이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은 8년 만이다. 대표팀 선수들은 “미식축구는 축구와 농구, 격투기의 장점을 결합한 지상 최고의 스포츠”라고 말했다. 대구=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프로 스포츠 왕국’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미식축구다. 지난해 미국의 한 여론조사 업체가 성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프로미식축구리그(NFL·35%)와 대학미식축구(11%)가 절반 가까운 46%의 선택을 받았다. 프로 양대 리그인 아메리칸 콘퍼런스와 내셔널 콘퍼런스 챔피언끼리 맞붙는 슈퍼볼은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최고의 이벤트다. 남자라면 대부분 학창 시절 미식축구를 해 봤다. 그들에게 NFL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다. ‘미국에서만’ 그렇다. 국내에서 미식축구는 ‘비인기 종목’에도 끼지 못하는 찬밥 중의 찬밥 신세다. 그래도 미식축구를 ‘지상 최고의 스포츠’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7월 미국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열리는 제5회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을 앞둔 미식축구 국가대표팀 훈련 현장을 찾았다.

대표팀 백성일 감독이 훈련을 지휘하고 있다.
대표팀 백성일 감독이 훈련을 지휘하고 있다.
한 달 같은 1박 2일… ‘소집’이 가장 어려워

“상대 체격이 크다고 겁먹지 마라. 최대한 몸을 붙여 막아야 못 도망가!”

3일 대구에 있는 경북대 운동장. 백성일 대표팀 감독(47)이 큰 목소리로 태클 연습을 시키고 있다. 호루라기가 울릴 때마다 6kg 가까운 장비를 착용한 선수들이 몸싸움을 한다. 비가 퍼붓는데도 훈련은 계속됐다. 비와 땀에 흠뻑 젖은 선수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거친 숨소리와 야수 같은 함성이 운동장을 뒤흔든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 여대생인 매니저들은 우비를 입은 채 포지션별로 나뉘어 훈련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전력 분석을 위해서다. 박경배 수석코치(46)는 “미식축구가 단순히 몸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가장 머리를 많이 쓰는 운동이라 치밀한 전력 분석이 필수다. 감독까지 포함하면 코칭스태프만 15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대표팀은 지난해 4월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쿠웨이트를 69-7로 꺾고 8년 만에 미식축구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국제미식축구연맹(IFAF)이 주관하는 월드컵은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4년마다 열린다. 한국은 2003년 독일에서 열린 2회 대회부터 참가했지만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에 0-88로 대패해 본선 티켓을 얻지 못했다. 일본이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진출한 2007년 본선 진출 8개국 중 5위를 차지한 게 최고 성적이다. 2011년에는 다시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에 0-77로 져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월드컵 본선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대표팀 전원이 모이는 것은 한 달에 한 번뿐. 돈이 없어서다. 대표팀을 관장하는 대한미식축구협회는 57개나 되는 대한체육회 가맹경기단체가 아니다. 준가맹단체(8개)나 인정단체(8개)에도 끼지 못한다. 널리 보급이 안 된 탓에 가맹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대한체육회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대표팀은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1박 2일 일정으로 합숙훈련을 해 오고 있다. 5월에는 2일 소집됐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총 64명에 달하는 코칭스태프와 선수, 매니저, 관계자들이 이날 경북대에 모였다. 대부분 생업이 있거나 대학에 다니고 있어 주중에는 모일 수가 없기에 1박 2일을 한 달처럼 써야 한다. 전국 각지에서 2일 오전 9시 30분에 경북대에 모인 대표팀은 전력 분석 세미나1-점심-전력 분석 세미나2-그라운드 훈련-저녁-포지션별 미팅-스태프 미팅으로 짜인 빡빡한 일정을 오후 11시까지 소화했다. 다음 날도 오전 7시에 일어나 포지션별 미팅-그라운드 훈련-점심-포지션별 미팅-그라운드 훈련을 이어 갔다. 다음 날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후 6시에 모든 일정을 마쳤다. 대회 직전인 다음 달에는 2차례의 1박 2일 훈련이 예정돼 있다. 체격 좋은 미국인들이 많은 동호회 ‘골든이글스’와의 평가전도 치를 예정이다.

미식축구 대표팀의 오펜스팀 선수들. 경기 때는 선수들이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연습할 때는 구분하기 위해 오펜스팀과 디펜스팀 선수들이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는다.
미식축구 대표팀의 오펜스팀 선수들. 경기 때는 선수들이 같은 유니폼을 입지만 연습할 때는 구분하기 위해 오펜스팀과 디펜스팀 선수들이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는다.
식비 지원 3000원… 출전 경비도 부담해야

태릉선수촌에서 훈련비(수당)를 받으며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종목과 달리 미식축구 대표팀은 자기 돈을 써 가며 훈련한다. 올림픽은 물론이고 아시아경기 종목도 아니다. 최고의 시설에 훈련비까지 받을 수 있는 태릉선수촌 입촌은 꿈도 꾸지 못한다. 감독도 코치도 ‘무급’이고, 단장이나 사무국장 등 스태프도 아무런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자원봉사자다. 최소한의 ‘열정 페이’도 없는 셈이다. 그나마 백성일 감독은 부산에서 수산물 유통업체, 박경백 수석코치는 건축자재 유통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라 회사에 얽매여 있는 대부분의 코치와 선수들보다는 시간을 내기가 나은 편이다. 백 감독은 “육체적으로 뛰어나고 운동을 잘하는 몇몇 선수들이 생업 때문에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 미식축구를 시작했고 지금은 공연기획사에서 일하는 홍보 담당 이철민 씨(32)는 “선배의 권유로 대표팀 일을 맡았다. 현재로서는 협회 일을 전담할 수 있는 유급 직원 한 명만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대표팀 선수단 전원은 미국 월드컵에 나갈 때도 최소한 항공비용은 부담해야 한다. 남은 기간 후원자가 나서지 않으면 자비 부담 금액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협회가 운영비 명목으로 합숙훈련 비용을 일부 지원하기는 한다. 한 끼 식사로 3000원을 지급한다. 3000원이 넘으면 나머지는 개인 부담이다. 경북대에 모일 때도 교통비는 당연히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다행히’ 하룻밤 모텔비는 협회가 냈다.

월드컵 대회 기간이 열흘이 넘다 보니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다. 대한체육회가 인정한 대표팀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 달리 출장이나 업무상 휴가 처리가 되지 않는다. 군포 수리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고 있는 대표팀 최고참 최성진 씨(38)는 “다른 일을 하다 교사가 됐기에 재직 기간이 짧다. 연차휴가가 별로 없어 쓸 수 있는 휴가를 다 모아도 대회 기간을 채우기 어렵다. 아내는 만류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월드컵에는 꼭 가겠다”고 말했다.

훈련 장소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경북대에서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학교 미식축구부 박경규 감독(67) 덕분이다. 경북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박 감독은 서울대 재학 시절 미식축구의 매력에 빠졌고 1983년 경북대에 미식축구 팀을 만든 인물이다. 지금도 국제미식축구연맹 아시아평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박 감독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미식축구가 덩치 크고 빠르기만 하다고 잘할 수 있는 종목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맹주이지만 우리도 훈련 여건만 좋아지면 일본은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 마음속에서 활활 타는 불… 그게 미식축구”

미식축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선수들은 주위에서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도대체 미식축구의 어떤 점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대학에 입학했을 때 몸무게가 58kg이었다(키 176cm). 그 체중으로 120kg이 넘는 상대와 몸싸움을 했다. 선배들이 계속 시켰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났고 두려움에 우울증도 겪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체중은 80kg이다. 누구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격렬한 몸싸움, 이게 정말 좋다.”(쿼터백 이찬우·동서대 4학년)

“미식축구는 내게 인생의 전부다. 그 매력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솔직히 다른 종목 선수들이나 훈련 여건이 좋은 일본 등 다른 나라 미식축구 대표팀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지금은 국가대표라는 것이 좋기만 하다.”(쿼터백 김태훈·블루스톰)

“여러 종목을 해 봤고 지금도 피트니스 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미식축구만큼 나를 미치게 하는 운동은 없다. 대학생 때는 돈을 벌지 못해 미식축구를 하는 게 눈치가 보였지만 지금은 여건이 훨씬 나아졌다. 마음껏 뛸 수 있는 전용구장만 하나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러닝백 전홍덕·블루스톰)

“풋볼(미식축구)은 내게 종교와도 같다. NFL이 있는 미국으로 ‘성지 순례’도 다녀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포츠이자, 한번 시작하면 누구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스포츠다.(수비코치 김연태)

“가업(주유소)을 이어받은 덕분에 다른 동료보다는 여유가 있다(웃음). 운동 실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성격이 좋다며 감독님이 주장을 맡기셨다. 미국에서는 ‘한 게임 하자’고 하면 당연히 미식축구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꿈꾸고 있다.”(러닝백 이동환·블루스톰)

“누군가 ‘왜 이렇게 힘든 여건에서 미식축구를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속에 활활 타는 불이 있다. 그게 바로 미식축구다’라고.”(백성일 감독)

“반쪽짜리 국가대표이지만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다고 자부한다. 발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나는 어렵게 미식축구를 했지만 후배들은 마음 놓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박경배 수석코치)

선수단 전원은 이구동성으로 미식축구가 ‘지상 최고의 스포츠’라고 했다. 축구(뛰며 발로 차고), 농구(손으로 패스하고), 격투기(몸싸움)의 장점을 결합한 데다 가장 객관적이고, 전문적이고, 공정한 종목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가장 머리를 많이 쓰는 ‘스마트한 운동’이라고 격찬했다. ‘지상 최고의 스포츠’를 하고 있다는 그들의 소망은 지극히 소박했다. 미식축구는 럭비와 다른 운동이라는 것을 주위에서 알아줬으면 하는 것. 한 선수가 말했다. “오늘도 ‘너 럭비 하러 가냐’는 말을 들었다.”

에필로그

선수들이 숙소로 돌아간 늦은 시간. 박경규 경북대 감독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팀 닥터를 겸하고 있는 노인환 대표팀 운영위원회 위원장(의사), 박재식 협회 전무(체육교사), 김동희 협회 사무국장(렌터카 법인대표), 이철민 홍보 담당이 참석했다. 예산 관련 안건들을 놓고 격론이 오갔다. 그 자리에서 유니폼 예산이 삭감됐고 훈련용 반바지는 안 만들기로 했다. 미국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읍소해 체재비를 줄여 달라고 하자는 얘기부터 미식축구팀이 있는 전국 대학을 대상으로 ‘후원의 밤’을 열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월드컵 출전을 위한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누군가 말했다. “선수들에게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할 수는 없다. 추가 예산이 마련되지 않으면 대회에 못 나갈 수도 있다.”

5월 합숙훈련 당시 100만 원 정도였던 개인 비용 부담은 21일 현재 200만 원까지 올라간 상태다. 그 사이 출전을 포기한 선수도 나왔다. 협회는 최근 한 업체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www.wadiz.kr/Campaign/Details/1104)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미식축구는 8년 만에 출전 티켓을 거머쥔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을까. 미국, 일본, 멕시코, 프랑스, 호주, 한국, 브라질(랭킹 순) 등 7개국이 참가하는 대회는 7월 8일 개막한다.

대구=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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