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전신마비 사고 딛고 일어선 전범석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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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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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서서 환자 돌보는 행복,사고 전엔 몰랐죠”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는 전범석 
교수. 그의 삶은 불의에 닥친 병마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9개월의 투병 끝에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병이 찾아오면 ‘왜 
하필 나에게’ 하는 자책보다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에 전념하는 게 중요하다”는 전 교수.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는 전범석 교수. 그의 삶은 불의에 닥친 병마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9개월의 투병 끝에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병이 찾아오면 ‘왜 하필 나에게’ 하는 자책보다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에 전념하는 게 중요하다”는 전 교수.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토요일(24일) 오후 서울대병원 분위기는 무거웠다. 장마가 이어지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무표정한 얼굴로 링거 병을 들고 다니는 환자들의 얼굴, 수심이 가득한 가족들의 얼굴, 피곤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바라보는 일은 미안하면서도 불편했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전범석 교수(52)의 방은 11층에 있었다. 사람이 오가기 힘든 세 평 남짓 좁은 연구실에는 낡은 에어컨이 소음을 내며 돌고 있었다. 국내 최고 권위의 대학병원 교수 방이 이렇게 초라했던가. 연구실 한쪽에 운동기구가 보였다. 그의 투병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외래 진료를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다는 그에게 “주말에 쉬지도 못하니 안 됐다”고 하자 “일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했을 뻔한 일터에 다시 서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뜻일 것이다.

전 교수는 16일 서울대병원 인사에서 신경과학교실 주임교수 겸 신경과 진료과장에 임명됐다.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 등 3개 병원 신경과를 운영하고 의사 65명을 지휘해야 하는 중책이다.

6년 전 전신마비로 병상에 누웠다가 재기한 전 교수 이야기는 한동안 의료계의 화제였다. 의사라고 해서 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질병으로 치명적 장애를 입은 것이나, 다시 일어선 것 모두 흔한 일은 아니다.

‘나 역시 의사이기는 하나 그에게 일어난 기적과 같은 회복에 과연 의학적 필연성이 작용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던 그가 유능하고 훌륭한 의사이자 교수로서 본분을 다하며 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 교수가 지난해 말 펴낸 투병기 ‘나는 서 있다’(예담)에 수록된 동료 이왕재 서울대 의대 교수의 말이다. 전 교수의 책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며 아직 고난이 끝나지 않은 사람의 기록이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담담하다. 삶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이토록 감정을 절제하며 써내려간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실제 만난 그는 책에서 느낀 그대로였다.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해도 좋을 만큼 표정도 말도 몸짓도 절제되어 있었다. 대답은 종종 단답형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냉정함은 생명에 대한 오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목숨을 다루는 일은 섣부른 희망이나 헛된 꿈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남을 치료할 때나, 자신의 병과 싸울 때에도 이런 신념은 똑같이 적용된 듯 보였다.

―의지가 강해 보이세요.

“그러니까 의대에 갔겠죠. 의대 들어가고 나오려면 웬만큼 참을성 없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책에 보면 투병 초기 공포와 두려움이 묻어나오던데….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치료가 시작되면서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는 투병을 전투에 비유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병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총탄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느냐인 것처럼 자신 역시 ‘어떻게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어 면회도 사절하고 심지어 부모에게조차 몇 개월 뒤에야 투병 사실을 알렸다.

―아직도 쓰러진 원인을 잘 모른다면서요.

“주말에 등산을 했습니다. 정상에 서자마자 통나무가 쓰러지듯 바위 앞으로 고꾸라졌어요. 다행히 앞니가 깨지면서 충격을 흡수한 덕에 더 심한 뇌손상은 면했지만 의식과 언어기능만 온전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전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많은 사람이 희망하는 모교 교수가 되었고 1993년에는 태아의 뇌세포를 파킨슨병 환자의 뇌에 이식하는 수술을 국내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지은 책만 9권에, 2000년 이후 10여 개 기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본 순조로운 삶이었다. 자기관리도 철저해서 건강에도 비교적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실패도 몰랐고 수치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그것도 환자를 돌보던 의사가 하루아침에 씻는 일, 먹는 일은 물론 목욕 배뇨 배변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 물었다.

등산중 갑자기 쓰러져 척수손상… 헬기로 이송 수술
“일할수 있어 감사할뿐” 이달 신경과학교실 주임 맡아
“이젠 환자입장 더 잘 보여… 사고가 나를 바꿨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가 참담했습니다. 약을 먹고 싶어도 내 손으로 구할 수도 없고 뛰어내리고 싶어도 높은 곳에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 말이죠.”(그는 당시 상황을 ‘다리가 부러진 채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못하는 짐승 같은 신세였다’고 책에 적었다)

그는 터진 디스크를 제거하고 위아래 척추를 고정하는 수술을 받은 후 3일 만에 물리치료와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수술은 잘됐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보통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 ‘왜 하필 내게’라는 마음이 먼저 든다던데요.

“저도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받나 하늘을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 일이 나만 비켜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오만이죠. 중요한 것은 ‘왜 하필 나냐’ 하는 자책이 아니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냉철함입니다.”

그의 말이 이 대목에서 다소 길게 이어졌다.

“힘든 병이 찾아오면 누구나 자책부터 하게 마련이죠. 오늘 만난 환자들 중에도 왜 이런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병이 나서 치료를 결심했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고 어떻게 병과 싸울 건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이 시작되는 거죠.”

그는 기자에게 “중환자실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있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난리죠? 한쪽에서 일(응급상황)이 터지면 그쪽으로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갑니다. 그 순간 저 같은 사람이 몸을 뒤집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도 뒤집어 줄 시간이 없는 거죠. 엘리베이터는 또 얼마나 밀립니까. 저만 해도 침대 카트에 실려 힘들게 타고 내려가면 주어진 물리치료 시간은 15분, 20분이에요. 그런 일들을 모두 그러려니 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가 말한 ‘주어진 상황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뜻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칫 부족할 수 있는 관대함이다. 병이 그를 바꿔 놓은 것일까.

“옛날엔 환자가 말을 안 들으면 왜 의사 말을 따르지 않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지금은 설사 잘 따라와 주지 않아도 ‘다 이유가 있겠지’ 이해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그는 “병이 나기 전에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의외의 말이었다.

“내 딴엔 가장 좋은 치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고 의사도 환자를 믿지 않는 불신이 팽배한 의료계 분위기에 불만이 많았죠. 지금은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친 뒤 갑자기 늙어 버렸나 봐요. 하하하.” 무표정했던 얼굴이 환해졌다.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행복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만족하고 있어요. 바라는 게 없다고 할까요. 아니, 바란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그에게선 의사를 넘어 철학자의 모습이 느껴졌다. 내친김에 그가 생각하는 죽음과 삶은 무엇인지 물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일 때도 그랬고 환자가 되어 중환자실에서도 죽음을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는데…. 죽음에 대해 담담해지던가요.

“글쎄요…. 누가 그러더군요. 죽음이란 누구나 꼭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일인데 그것에 대한 준비는 허술하다고. 그렇다고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가진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절대자가 생을 관장하나요. 아니면 유전자인가요, 팔자인가요.

“(미소를 띠며) 잘 모르겠어요. 생명이란 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선생님 같은 분이 잘 모르겠다고 하니 오히려 이상합니다.

“(잠시 침묵 후)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잖아요.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밖에 없으니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그래도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번성한 이유는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하며 돕고 살기 때문이라고 해요.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남을 도울 때 행복감을 느끼고 마음이 편하다는 실험 결과도 있고요. 어쩌면 남을 도우며 사는 게 자기를 위해 사는 일이기도 하죠.”

전 교수는 책에서 아들을 갑자기 잃은 유대교 랍비 쿠쉬너가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란 책을 인용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절망, 분노, 원망, 후회, 자기연민 이런 것들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지 못한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쿠쉬너가 자신의 삶에 닥친 불행을 극복함으로써 남의 슬픔과 불행에 공감하는 훌륭한 랍비가 되었듯 나 역시 내 육신의 고난을 통해 좀 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따뜻한 의사, 이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병은 ‘의사 전범석’을 무너뜨렸지만 그는 환자를 이해하는 ‘진정한 의사 전범석’이 되어 환자 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만난 병원 풍경은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어디에선가 저마다의 고통을 껴안고 그것을 이기려 애쓰는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겹치면서 고통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희망이 싹틀 수 있는 곳임이 느껴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전범석 교수

―1976년 남성고등학교(전북 익산) 졸업
―1982년 서울대 의대 졸업
―1987년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신경과 전문의 취득(의학석사)
―1991년 미국 미네소타대 의대 신경과 전공의 수료(의학석사)
―1993년 컬럼비아대 신경과 파킨슨병 분야 전임의
―1995년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해부학 전공(의학박사)
―1993년∼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1999년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 선정 제1회 ‘젊은 연구자상’, 2003년 본보 베스트닥터 선정
―현재 서울대 의대 의료정책실장, 대한파킨슨병 및 이상운동질환학회 회장
―저서 ‘가정의학’ ‘신경과학’ 등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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