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비선라인에 사로잡힌 문재인의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3일 20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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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위원도 모른 당 대표 회견…“친노秘線하고만 논의” 불만
고질적 계파 패권주의
선거마다 참패 안기는데 참모 공천주려고 당권 잡았나
유능한 비선이면 당직을 주라, 아니면 당정농단 끊어내든지

4·29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4 대 0 참패보다 내게 충격적인 건 문재인 대표의 비선(秘線) 논란이었다.

비노(비노무현)인 이춘석 당 전략홍보본부장이 “전략은 역시 당대표 측근이 해야 하는 것 같다”는 말로 진짜 전략에서 소외됐음을 내비치자 “대표가 당 공조직이 아닌 측근 그룹과 일한다더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한 최고위원은 “선거 다음 날 문 대표가 정부여당에 전면전을 선포하는 내용도 TV 보고 알았다”며 친노(친노무현) 비선하고만 논의하는 건 잘못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비선이라니! 작년 말 정윤회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터졌을 때 “공적 시스템 밖에서 대통령의 권력 운용에 개입하는 비선의 존재는 정권을 병들게 하고 국정을 망치는 암적 요소”라고 준열히 비판했던 사람이 문재인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그의 당대표 등극을 전후해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 예사롭지 않다. ‘18대 대선평가보고서’에서 친노 패권주의를 대선 패배 요인으로 지적한 그는 “박근혜 대통령처럼 문 대표도 비선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며 친노를 멀리할 것을 당부했었다.

물론 문재인은 2013년 말 발간한 ‘1219 끝이 시작이다’ 책에 “대선캠프 실무진에서 참여정부 출신을 배제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어쩌랴. 친노 참모 실세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대선 직전 이른바 삼철(전해철 의원·이호철 전 대통령민정수석·양정철)을 비롯한 친노 9인은 보직 사퇴를 한 것이지 대선에서 뒷짐 지고 있겠다고 한 건 아니다”라고 그해 5월 주간경향에다 고백했으니.

“후보가 메시지를 결정할 때까지 (선거캠프는) 아무것도 못했다. 밤 2, 3시에 후보가 메시지담당(양정철)에게 직접 전화했다”는 보고서가 맞는다면,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된다. 본인은 사실과 다르다지만 노 정부 때 유진룡 문화부차관에게 “배 째드리지요” 했다는 사람이 양정철이다. 경제정당 안보정당을 내세우던 재·보선 전략이 갑자기 ‘정권심판’으로 돌변한 것도, “사면은 법무부 소관”이라던 문재인이 느닷없이 “별도 특검으로 성완종 리스트 수사하라”고 외친 것도, 왜 꼭 한 박자씩 뒤늦게 강경한 소리를 내서 지지자는 결집시켰을지 모르나 다수 국민과 당 지도부를 황당하게 만들었는지도 알 것 같아진다.

문제는 TV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도 아닌데 어디까지가 문재인 목소리이고, 어디서부터가 립싱크인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문재인이 오늘날 정치인 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이 자서전 ‘운명’이었다. 그런데 정치 참여 선언이나 다름없는 이 책의 제목을 문재인이 완강히 거부했다면,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는 그 뭉클한 마지막 문장이 일찌감치 문재인을 차기 주자로 점찍었던 친노 참모의 작품이라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당초 정치에 뜻이 없던 문재인을 총선과 대선에 이끌어낸 사람이 양정철을 비롯한 참모들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대선 패배자가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서둘러 당권 도전에 나선 이유가 내년 총선 공천을 노린 이들의 종용 때문이라는 뒷말은 예사롭지 않다. 곡절 끝에 관악을에 나섰다가 ‘친노 반감’만 확인시킨 정태호 후보도 최측근 9인방 중 하나였다.

아무리 “재·보선 패배에 책임지라”는 요구가 터져나와도 문재인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잘못도, 반성도 모르는 것이 친노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2016년 총선은 2012년의 되풀이가 될 것이고, 또 친노 패권주의로 졌다는 분석이 나올 공산이 크다.

당 싱크탱크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대권정치를 포기하고 당권정치에 집착한 정당 리더십 때문” “현대적 사민주의는 국가 주도 분배가 아니라 노력, 기회 강조” “정치를 시민운동화하는 격돌정치로는 집권할 순 없다” 같은 보고서를 잇달아 내놔도 당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이 싸가지 없는 비선에 사로잡혀 당권정치 격돌정치만 계속한다면 말이다.

새정치연합은 대통령에게 요구했듯 당대표에게도 비선을 밝히라고 들이대기 바란다. 문재인도 비선이 그토록 유능하다면 당직을 못 줄 이유가 없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노 대통령처럼 “나를 놓아 달라”고 사정할 게 아니라 스스로 끊어내야 할 것이다. 그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다면 새누리당에 만년 여당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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