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식 전문기자의 스포츠&]발로는 영광을, 입으로는 품격을 이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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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오픈 4강 경기를 마친 뒤 악수를 하고있는 로저 페더러(왼쪽)와 정현.
호주오픈 4강 경기를 마친 뒤 악수를 하고있는 로저 페더러(왼쪽)와 정현.
“오늘은 내 부상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 인정받아야 할 정현의 승리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2018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 16강전이 끝난 후 열린 공식 인터뷰. 정현(22·한국체대)에게 패한 노바크 조코비치(31·세르비아)는 지난해 하반기 6개월이나 코트를 떠나 있었던 원인인 팔꿈치 부상과 완쾌 여부를 묻는 질문이 이어지자 단호한 표정과 어조로 부상 관련 질문을 사절했다. 전 세계랭킹 1위의 위엄은 존중받았다. 이후 부상 관련 질문은 딱 끊겼다.

이번에야 알았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은 말솜씨도 수준급이라는 것을. 정현에게 4강전에서 기권승을 거둔 로저 페더러(37·스위스)의 온 코트(on court) 인터뷰에서는 ‘테니스 황제’의 품격이 느껴진다.

“나도 부상을 안고 경기를 뛴 적이 있다.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며 “정현은 충분히 세계 톱10 안에 들 실력을 갖췄다. 멋진 정신력과 체력을 가졌다”며 엄지를 세웠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메이저 대회 준결승에서 경기를 포기했겠는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듯한 페더러의 멘트는 정현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결승 진출을 다퉜던 경쟁자 이전에 대선배로서 후배에게 격려의 말을 남긴 것도 인상적이었다.

‘정현 신드롬’은 ‘한국 테니스 사상 첫 메이저 4강 진출 쾌거’라는 단순 성적표만 갖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정현 열풍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조코비치를 꺾은 직후 가진 현장 인터뷰에서 촉발됐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유머 감각으로 호주 멜버른 로드레이버 아레나를 꽉 채운 1만5000여 명의 관중을 쥐락펴락했다. 대부분의 국내 시청자들은 정현이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을 것이다.

만약 생방송 온 코트 인터뷰 진행자로 나선 왕년의 스타 짐 쿠리어(미국)가 한국어 통역을 동반했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언더도그(Underdog·약자)의 반란’이 박수갈채는 받았겠지만 기립박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현의 16강전 온 코트 인터뷰의 백미는 마지막에 나왔다. 한국 팬들에게도 인사말을 해 달라는 쿠리어의 주문에 정현은 “한국말로 해도 되느냐?”며 양해를 구한 뒤, 한국말로 승리 소감을 밝혔다. 이 대목이 생중계를 보던 고국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 당당함이 국내에서의 정현 열풍에 불길을 댕겼다. 이후 국내외 언론은 ‘차세대 스타’ 정현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연이어 싣고 있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게다가 뉘앙스가 중요하다. 통역을 거치면 이 모든 게 한계가 있다. 국내 프로 종목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의 ‘오늘의 수훈 선수’ 인터뷰를 유심히 들어볼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해당 선수는 뭔가를 자세히 답변했는데, 통역의 입을 거쳐서 나온 대답은 짧기도 하거니와 상투적인 표현이 다반사다. 2%가 아니라 20%는 부족하다.

그런데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스포츠 스타들은 설화(舌禍)를 경계해야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무심코 올린 글로 낭패를 보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현의 이번 호주오픈 출전 당시 언행은 20대 초반 젊은이로서는 무척이나 진중했다.

그가 16강전 경기 후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직전 TV카메라 렌즈 바로 앞 투명 패널에 한 한글 사인 ‘캡틴, 보고 있나?’는 화제가 됐다. 2015년 소속팀 해체 당시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감독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뜻이 함축된 표현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정현의 공식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정현은 온 코트 인터뷰에서 한국말로 소감을 밝힐 때 감정 조절을 못 했다면 팀 해체 당시의 울분을 토로할 수도 있었지만 참아낸 것이다. 대견하다.

언론학 개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일은 이 세상에 없었던 일이다.’ 곱씹어 볼수록 고개가 끄떡여진다. 스포츠 선수에게 인터뷰는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몸으로만, 기록으로만 보여주는 것보다 생생한 사연이 곁들여지면 훨씬 효과적이다.

인터뷰도 실력이다. 글로벌 스포츠 무대를 겨냥하는 선수들에게 외국어 구사 능력은 기본이다. 그런데 현장 인터뷰는 녹록지 않다. 회식 자리에서 갑자기 건배사를 맡으면 당황하듯, 인터뷰도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그 핵심은 미사여구가 아닌 진정성이다. 이틀 뒤면 지구촌 최대 겨울 스포츠축제인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이 개막한다. 울림이 있는 인터뷰가 풍성하길 기대한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
#호주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정현#노바크 조코비치#로저 페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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