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기정]‘목매는 메달’은 안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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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산업2부 차장
고기정 산업2부 차장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있게 한 건 부모의 헌신과 희생이라고들 한다. 우리는 이런 얘기에 익숙하다.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에서도 그랬다. 생업을 접은 채 딸 뒷바라지를 했다거나, 은행 대출을 받아 전지훈련을 보낸 사연이 소개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자식 중 한 명만 운동을 시켰다는 얘기도 있었다. 헌신과 희생은 늘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노는 듯 즐기는 올림픽 국가대표는 한국에선 아직 자연스러운 편은 아니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웃통을 벗어 던진 ‘통가 근육맨’ 피타 타우파토푸아는 원래 태권도 선수였다. 14개월 전에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전향했다. 이번 레이스에서 119명 중 114등을 했다. 스키 왕초보인 그에겐 올림픽 최저 출전 자격을 맞추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다음에는 수상 종목에 도전하겠단다.

핀란드 컬링 믹스더블의 오나 카우스테의 직업은 미용사다. 그의 짝인 토미 란타메키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다. 캐나다 컬링 여자대표팀의 에마 미스큐는 디자이너, 조앤 코트니는 간호사다. 미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골리 앨릭스 릭스비는 신발 판매원이며 독일 선수단에는 현직 경찰도 2명이 있다.

올림픽은 누구에겐 인생 최대의 놀이터지만, 다른 누구에겐 인생을 거는 승부처다. 올림픽을 대하는 각국 선수들의 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현재를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 체육계에서 올림픽 경기는 개인적 성공을 위한 성전(聖戰)이기도 하다. 국가대표가 되느냐 안 되느냐,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선수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엘리트 체육으로 재단되고, 부모들은 이 경쟁을 뚫기 위해 무한정 헌신하고 희생한다. 그러니 국민 대다수가 쇼트트랙 경기장을 본 적조차 없는 나라가 쇼트트랙 최강국이 됐다. 메달리스트 성공기를 읽다 보면 대치동 학원가가 오버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헌신과 희생은 실은 개발연대에 더 맞는 덕목이다. 노동과 자본을 국가적 규모로 쏟아부어 선진국을 추격하는 요소투입형 성장기에는 개인을 넘어 국민 일반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다. 다양성과 창의는 걸림돌로 치부되곤 했다.

경제 상황이 바뀐 뒤엔 이런 성공 모델이 정치적으로 거부됐다. 그럼에도 개인의 영역에선 가용 자원을 대량으로 자녀에게 투입하고, 자발적이자 경쟁적으로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제공하는 모델이 더 강화되고 있다.

요즘 관가에선 행정고시 출신 젊은 사무관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한다. 과거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물불 안 가리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보고서 속에 자기 생각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사무관들이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떨어지니 정책 아이디어를 관가 주변을 배회하는 홍보기획사 등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이를 정부 사업으로 발주하면 해당 기획사가 수주하기 쉬워진다. 비단 정부뿐 아니라 민간 부문도 다양성과 창의성 부족으로 국제 경쟁에서 고전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성공기가 드리운 그늘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성공 모델이 언제까지 한국의 주류 모델로 기능할지는 모르겠다. 이번 올림픽에선 예외적 사례가 늘고 있어서 반갑다. 컬링 혼성 대표 장혜지 선수는 야간자율학습을 안 하는 게 좋아서 컬링을 시작했다고 한다. 강릉과 평창의 경기장은 감동의 눈물뿐 아니라 승패와 상관없는 축제의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팬들은 금메달 같은 은메달에 환호성을 질렀고, 노메달이라도 땀과 노력에 열광했다. 다음 올림픽에선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우리 시대의 성공기를 봤으면 한다.
 
고기정 산업2부 차장 koh@donga.com
#평창 겨울올림픽#통가 근육맨#피타 타우파토푸아#오나 카우스테#토미 란타메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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