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유권자 불만이 에너지… 反난민-反EU 고립주의 선봉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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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휩쓰는 극우 정치인 열풍

 《유럽 운명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극우 대통령이 탄생할 것인지 전 유럽이 숨죽이며 우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4일(현지 시간) 실시되는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극우 성향의 자유당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가 승리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첫 극우 국가 지도자가 된다.

 오스트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극우 열풍은 유럽 여러 국가로 확산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그저 ‘이단아’ 정도로 무시됐던 유럽 극우 정당들이 현실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을 에너지로 삼아 점점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된 실업난, 빈부격차 확대 등의 화살이 유럽연합(EU)으로 향하고, 잇따라 터지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중동 난민 유입 사태와 맞물려 각국에서 고립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극우 정당은 몇몇 국가의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2∼4위까지 뛰어올랐다. 극우 집권 시대의 서막이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기득권층의 상징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승리한 것도 극우 정치인들의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의 승리에 환호하며 변화의 바람이 유럽까지 번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

노르베르트 호퍼(45)


오스트리아 자유당 호퍼
오스트리아 자유당 호퍼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1990년대 이후 생긴 다른 국가의 극우 정당과 달리 역사가 길다. 오스트리아에선 1956년에 이미 극우 정당이 생겼다. 1990년대에는 ‘나치와 히틀러를 찬양한다’고 공공연히 밝힌 외르크 하이더 당수의 주도하에 자유당의 당세가 확대됐다. 2000년 자유당이 연정에 참여하자 유럽 각국이 오스트리아를 ‘왕따’시킬 정도로 철저하게 이단아였다.

 호퍼의 아버지는 중도우파 성향의 오스트리아 국민당(OVP)의 지방의회 의원이었다. 전기 발전소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호퍼는 고교 졸업 뒤 항공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97년부터 10년간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이젠슈타트 지역에서 시의원을 지내며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헝가리 난민 문제로 골치를 앓는 지역이었다.

 말끔한 외모와 깔끔한 패션 센스, 부드러운 언변이 강점인 호퍼는 상대적으로 극우 정치인의 색채가 옅다. “더 이상 극우 정당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유대인 커뮤니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히틀러 생가를 철거하겠다고도 했다. 2003년 패러글라이더를 타다 추락한 이후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났을 때를 꼽는 그는 이후 장애인 정책에 몰두했다.

 이공계 전공을 살려 환경과 에너지에도 관심이 많다.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연금과 헬스케어를 강화하겠다며 진보 진영의 복지강화 정책도 공약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반대 진영에서는 그를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슬람 폭력에 반대하며 군대와 경찰을 강화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EU 탈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EU에도 부정적이다. 

‘트럼프의 절친’

나이절 패라지(52)


영국 영국독립당 패라지
영국 영국독립당 패라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승리 후 외국 정치인 중 처음으로 만난 사람, 트럼프 당선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사람, 영국독립당(UKIP) 전 대표 나이절 패라지다.

 2006년부터 10년간 맡았던 UKIP 대표직을 내려놓았지만 그에게 올해는 인생 최고의 해로 기억될 듯싶다. 하원 의석 650개 중 단 한 석밖에 없는 UKIP는 올 6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를 성공으로 이끌고, 트럼프의 미 대선 승리에 일조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패라지의 집안은 19세기에 독일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시티오브런던 은행가에서 브로커 일을 했으나 패라지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갔다. 패라지는 대학 때부터 보수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졸업 후 보수당에 몸담은 그는 1992년 유로화를 도입하고 유럽 통합을 경제를 넘어 외교-사법까지 확장시키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반대했다. 1992년 보수당을 나와 이듬해 UKIP를 창설했다. 당명인 영국독립당에서 ‘독립’은 EU로부터의 탈퇴를 뜻한다.

 1994년부터 계속 선거에 출마하던 그는 1999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됐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UKIP는 27.5%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영국에서 노동당과 보수당, 자유당이 아닌 정당이 전국 단위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건 108년 만의 일이었다.

 트럼프를 공개 지지하며 미 대선에 개입했던 그는 다음 목표를 프랑스 대선으로 정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AP통신 인터뷰에서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 마린 르펜 국민전선(FN) 대표가 이길 것”이라며 “르펜이 이긴다면 유럽통합 프로젝트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미다스의 손’ 행보가 계속될지 주목된다. 

지역당을 전국 정당으로

마테오 살비니(42)


이탈리아 북부동맹 살비니
이탈리아 북부동맹 살비니
 오스트리아 대선일인 4일 유럽에서 또 다른 중요한 투표가 실시된다. 이탈리아 국민투표다. 마테오 렌치 총리가 상원의 힘을 약화시켜 행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도하고 있는 이번 국민투표는 그의 경제 실정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신임 투표로 성격이 바뀌면서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부결되면 렌치 총리가 물러나고 내년 초 조기 총선이 불가피해진다. 극좌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당 오성운동과 함께 부결에 가장 앞장서는 인물이 이탈리아 북부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다.

 1991년 설립된 이탈리아 북부동맹은 원래 북부 이탈리아의 분리·독립을 주장한 파다니아 운동에서 시작됐다. 북부동맹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지역 정당의 느낌이 강했다. 이를 뒤바꾼 게 살비니다. 그는 2013년 당 대표에 오른 뒤 당의 이미지를 180도 바꿨다.

 살비니는 유로화 도입을 ‘인류를 향한 범죄’로 표현하며 반(反)EU 운동을 펼쳤다. 2014년 당의 로고를 ‘반유로(basta euro)’로 바꾸고 프랑스 FN 등 EU에 반대하는 유럽 극우 정당과 함께 선거를 치렀다. 2015년부터는 전국적으로 난민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는데 지난해부터 모든 선거에서 2∼3위를 차지하는 등 주요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살비니는 우파를 대변하는 집권을 꿈꾸고 있다. 지난달 11일 여론조사에서 북부동맹은 지지율 3위였다. 살비니 대표는 최근 “지금은 주저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할 시기가 아니다”라며 총리 도전도 선언했다.

 1973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좌익 운동을 했다. 1993년부터 2012년까지 밀라노 시의원을 지낸 뒤 2004년 유럽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감세를 지지하고,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반대한다.
 
반(反)이슬람의 최고봉

헤이르트 빌더르스(53)


네덜란드 자유당 빌더르스
네덜란드 자유당 빌더르스
 4일 오스트리아 대선과 이탈리아 국민투표라는 극우의 파고를 넘으면 내년 3월 네덜란드 총선으로 이어진다. 이번 총선에서 태풍의 핵은 자유당(PVV) 대표 헤이르트 빌더르스다.

 스스로 “네덜란드의 절반은 나를 사랑하고, 절반은 나를 증오한다. 그 중간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빌더르스가 다니는 곳엔 늘 사복경찰 6명이 따라다닌다. 그는 방탄 지붕과 대피 공간이 있는 집에 산다. 2004년 헤이그 빌딩에서 그를 살해하려던 2명의 용의자가 수류탄 3개를 갖고 1시간 동안 대치하다가 잡힌 사건 이후부터다.

 빌더르스는 극우 지도자 가운데 반이슬람 성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10월 29일 네덜란드 하원이 공공장소에서 부르카 등 얼굴 전체를 가리는 복장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는 “내년 총선에서 승리해 공공장소뿐만 아니라 아예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겠다”고 한발 더 나갔다.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 폐쇄, 꾸란 금지가 총선 공약이다. 150석 중 12석을 갖고 있는 PVV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2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중도우파 성향의 여당 자유민주당(VVD)과 1, 2위를 다투고 있다. 내년 3월 총선에서 최소 30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의 이슬람 혐오는 한 여행길에서 시작됐다. 고교 졸업 후 돈이 없어 본래 가고 싶었던 호주를 포기하고 여행을 떠난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수년간 이스라엘 모샤브(이스라엘 협동농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이스라엘과 연대감을 느껴 반이슬람 성향이 강해졌다. 탈색한 금발의 독특한 머리 스타일 때문에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길

마린 르펜(48)


프랑스 국민전선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 마린 르펜
 마린 르펜의 인생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1972년 그가 네 살 때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FN을 창당한 이후 학교에서 “아빠는 파시스트”라는 놀림을 받고 자랐다. 여덟 살 때 한밤중 집 앞에서 터진 20kg의 다이너마이트는 유년 시절 공포로 남아 있다.

 이후 르펜은 1986년 열여덟 살 나이에 FN에 합류했다. 파리2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사법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됐다. 2011년 당 대표로 선출될 때도 아버지와 함께 “비브(프랑스어로 ‘만세’)”를 외쳤다.

 2012년 1차 대선 투표에서 17.9%로 3위를 차지할 만큼 고정 지지층이 적지 않은 그는 지난해부터 프랑스에 잇따라 테러가 터진 여파로 명실상부한 대선 후보가 됐다. 지난해 12월 FN은 광역자치단체인 도 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득표율 28%로 1위를 차지했다.

 올해는 더 날개를 달았다. 스스로를 ‘마담 프렉시트(프랑스의 EU 탈퇴)’라고 부르는 그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EU는 ‘인민의 봄’ 혁명을 맞아 소련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4월 1차 대선 투표에서 1, 2위 결선투표 진출이 유력할 만큼 지지율도 안정적이다. 그사이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갔다. 아버지가 “독일 나치 가스실은 역사의 일부일 뿐”이라며 나치 옹호 발언을 하자 지난해 당에서 쫓아냈다.

 이민정책과 무역정책은 보호주의를 내세우지만 경제정책은 오히려 사회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 보수 정당인 공화당과 달리 국가의 기업 개입을 강화하고 복지정책을 강조한다. 르펜은 두 차례 이혼을 경험했고 지금은 알제리 유대인 출신의 루이 알리오와 연애 중이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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