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갔다 노숙자로” 사이판 악몽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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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1800여명 태풍에 고립
태풍 ‘위투’ 강타, 숙소 무너져 물-전기-통신 끊기고 공항 폐쇄
“정부는 ‘안전유의’ 문자 2통뿐”… 27일 軍 수송기 1대 파견 추진



폐허 된 호텔-공항… 귀국길 막혀 발 동동 초대형 태풍 ‘위투’로 한국인 관광객 1800여 명이 
사이판에 고립됐다. 부서진 방 대신에 다른 방을 예약하기 위해 현지 호텔 로비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관광객들 
뒤로는 임시 매트가 여러 장 쌓여 있다(위쪽 사진). 최대 풍속이 초속 58m에 이르는 태풍에 사이판 공항 국내 청사의 천장이 
무너진 모습을 현지 관광객이 찍어 트위터에 올린 사진(아래쪽 사진). 한국인 관광객 제공·트위터 캡처
폐허 된 호텔-공항… 귀국길 막혀 발 동동 초대형 태풍 ‘위투’로 한국인 관광객 1800여 명이 사이판에 고립됐다. 부서진 방 대신에 다른 방을 예약하기 위해 현지 호텔 로비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관광객들 뒤로는 임시 매트가 여러 장 쌓여 있다(위쪽 사진). 최대 풍속이 초속 58m에 이르는 태풍에 사이판 공항 국내 청사의 천장이 무너진 모습을 현지 관광객이 찍어 트위터에 올린 사진(아래쪽 사진). 한국인 관광객 제공·트위터 캡처
초대형 태풍 ‘위투’가 24, 25일(현지 시간) 사이판섬을 강타해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로 돌변하면서 한국인 관광객 1800여 명이 오도 가도 못하는 노숙인 신세가 됐다. 현지 공항은 폐쇄됐으며 숙박시설이 부족해 많은 관광객들이 호텔 로비나 사무실 등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물과 전기 공급이 끊기고 식당도 상당수 운영이 중단돼 임산부나 노약자들은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다.

가족 여행을 왔다가 한순간에 ‘난민 가족’이 된 관광객은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에 불만을 터뜨렸다. ‘안전에 유의하라’는 원론적 수준의 로밍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 외에 다른 초동대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은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숙박 정보나 구호물품 등을 주고받으며 ‘자력갱생’했다.

제26호 태풍 ‘위투’는 최대풍속이 초속 58m에 이르는 초대형 태풍이다. 이 태풍으로 가로수와 전신주가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건물 지붕이 뜯겨 날아갔다. 현지 여성(44세) 한 명이 숨졌고, 1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이판 국제공항은 24일 폐쇄돼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이 묶였다.

사이판으로 신혼여행을 온 김모 씨(25·여)는 “한순간에 숙소 천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유리창이 추가로 깨지는 것을 막으려고 침대와 소파를 창문 앞에 세워놓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조모 씨(36·여)는 “비바람이 워낙 거세 건물이 흔들렸다. 방이 무너질까 봐 여권만 챙겨 뛰쳐나왔다”고 했다.

대부분의 숙소는 물과 전기가 끊겼다. 휴대전화 등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외부와 연락하기도 쉽지 않다. 호텔 저층이 발목까지 물이 차 고층으로 올라가 복도에서 대기하는 투숙객도 많았다. 귀국길이 막혀 열악한 숙소라도 구해야 하지만 이마저 ‘하늘의 별 따기’다. 방이 필요한 관광객이 폭증한 데다 집을 잃은 현지인까지 숙소 확보에 나선 탓이다. 방값은 2배까지 치솟았다. 한 관광객은 “비싼 방값도 문제지만 방 자체가 없어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일단 구해도 기간 연장이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생필품 물가도 폭등했다. 1.75달러이던 생수 한 병이 3배가량 오른 5달러에 팔린다. 관광객 금모 씨(24·여)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부서져 인출도 못 한다. 비행기가 며칠 더 못 뜨면 굶으며 노숙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 태교여행-효도관광 왔다가… “숙소 복도서 뜬눈으로 밤새워” ▼

폐허로 변한 거리 25일(현지 시간) 미국 자치령 북마리아나제도를 강타한 슈퍼태풍 ‘위투’의 위력으로 사이판 거리에 뒤집어진 차량과 뜯겨 나간 건물 자재가 나뒹굴고 있다. 강력한 바람에 전신주와 나무가 쓰러지기도 했다. 사진 출처 choi_junyoung84 인스타그램
폐허로 변한 거리 25일(현지 시간) 미국 자치령 북마리아나제도를 강타한 슈퍼태풍 ‘위투’의 위력으로 사이판 거리에 뒤집어진 차량과 뜯겨 나간 건물 자재가 나뒹굴고 있다. 강력한 바람에 전신주와 나무가 쓰러지기도 했다. 사진 출처 choi_junyoung84 인스타그램
사이판에 고립된 한국인 관광객 중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다. 인천공항에서 직항으로 4시간 거리인 사이판은 연간 20만 명 정도가 방문하고, 특히 태교 여행이나 효도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이 때문에 현지에 고립된 관광객 중에는 신혼부부나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직장인 최모 씨(34·여)는 “몇 년간 돈을 모아 아이 데리고 떠나온 첫 해외여행인데 이렇게 갇혀버렸다. 묵을 곳도 없고 갑자기 오른 물가를 감당하려면 빚내서 귀국하게 생겼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들은 제때 챙겨 먹어야 할 약이 떨어지거나 아수라장 속에서 안정을 취하지 못해 고통을 호소했다. 영유아를 데리고 온 부부들은 기저귀가 떨어져 손으로 빨아서 재사용하며 버텼다.

정부는 태풍 전후 현지 관광객들에게 두 차례 긴급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24일 ‘태풍 통과로 공항 폐쇄 예정, 신변안전 유의’, 25일 ‘태풍 통과에 따라 공항 폐쇄, 항공기 일정 변경 등에 유의, 항공기 일정은 각 항공사 홈페이지 참조 요망’ 등 2건이었다. 하지만 원론적인 안내에 불과해 관광객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의료 지원이나 항공편 이용 등 실질적인 정보는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광객 서모 씨(20·여)는 “25일 외교부 영사콜센터에 항공편이나 공항 이용에 대해 문의했지만 ‘모르겠다’ ‘항공사에 문의하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들었다. ‘사이판에 태풍이 심각하냐’고 되물으며 안이한 인식을 보였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단체대화방을 개설해 빈 객실이 있는 숙소와 생필품 물가 등 정보를 공유했다. 일부 관광객들은 서로 필요한 물품을 주고받았다. 신혼여행 중인 임신부 박모 씨(27)는 “숙소, 식사 등 모든 게 불안정해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철분제가 필요해 다른 임산부들에게 수소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이판 공항은 27일까지 시설 보수를 끝내고 이르면 28일부터 일부 구간 운영을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항공사들은 귀국 항공기 운영 일정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사이판에 취항 중인 아시아나항공과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가운데 제주항공과 티웨이항공은 각각 31일과 28일까지 결항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군 수송기를 사이판에 파견해 관광객들의 귀환을 돕기로 하는 등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외교부 등 관계기관은 26일 대책회의를 열고 사이판 공항 재개가 늦어질 경우 27일 군 수송기 1대 파견을 추진하기로 했다. 군 수송기는 사이판에서 괌으로 우리 국민을 수송한다. 괌에서 한국까지는 국적 항공기를 추가 편성해 귀환을 도울 계획이다.

군 수송기는 최대 90명이 탈 수 있으며 하루 2회 운항한다. 정부는 임산부 등 노약자부터 우선 수송한 뒤 필요하면 추가 파견을 검토할 계획이다. 관광객들은 “1800여 명이 고립되어 있는데 하루 최대 수송인원이 180명뿐이라면 나머지는 어떡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하나투어와 모두투어 등은 출발일 기준 11월 말까지 사이판 여행상품을 예약한 고객에게 취소 수수료 없이 100% 환불 처리를 할 방침이다.

구특교 kootg@donga.com·김정훈·신나리 기자
#사이판#태풍#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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