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젓갈 겉절이에 반한 외국인들… ‘마약 넣었나’ 물어봐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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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연구 ‘발효스콜레’ 이미란씨

11일 경기 양평군 강하면 양평전원교회 앞마당에서 이미란 씨(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 씨의 김치연구반을 수강하는 주부들이 전통 계절김치인 가지갈래김치를 완성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올 4월부터 본격적으로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이들은 내년 4월까지 100여 종류의 김치를 완성한 뒤 김치연구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양평=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1일 경기 양평군 강하면 양평전원교회 앞마당에서 이미란 씨(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 씨의 김치연구반을 수강하는 주부들이 전통 계절김치인 가지갈래김치를 완성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올 4월부터 본격적으로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이들은 내년 4월까지 100여 종류의 김치를 완성한 뒤 김치연구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양평=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경기 양평군 강하면 양평전원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면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냄새의 진원지는 마당에 자리한 발효작업장 ‘발효 스콜레(schole·학교를 뜻하는 그리스어)’. 11일 찾은 발효스콜레에는 오전부터 모여든 50, 60대 주부 7명이 양파와 노각(늙은 오이) 등을 다듬느라 분주했다. 처음으로 한반도 전역에 폭염특보가 내린 이날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거나 스카프를 둘러 잔뜩 멋을 낸 주부들은 얼갈이배추 수십 단을 손질하면서 구슬땀을 흘렸다.

이 중에는 검은색 모시치마를 입은 채 작업장을 동분서주 오가는 ‘아줌마 대장’이 있었다. 발효스콜레의 주인 이미란 씨(54)다. 2004년부터 김치 연구에 푹 빠진 이 씨는 올 4월 알음알음 아줌마들을 모아 김치 연구반을 만들었다.

사업가나 퇴직 교수, 요리전문가 등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펼쳤거나 지금도 계속하는 열혈 주부들이다. 그러나 막상 김장을 제대로 해 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이른바 ‘김포댁(김장 담그기를 포기한 주부)’ 출신이 많다.

세계인의 ‘집밥’ 정서와 통한 한국 김치

심리치료사였던 이 씨가 김치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난민 의료 봉사 활동이 계기가 됐다. 의료 봉사 도중 걸린 아메바성 이질을 제때 치료하지 못한 이 씨는 한국에 돌아와 결국 말초신경 등이 파괴되는 길랭바레 증후군을 앓았다. 전신 대부분이 마비된 그는 꼬박 2년을 누워 지냈다.

“2004년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죽을 만큼 먹고 싶었던 게 바로 묵은지와 된장찌개였어요. 2년 만에 묵은지를 잘게 썰어 넣어 부친 김치전을 먹었을 땐 마치 꺼져가는 불에 연료를 부은 것처럼 갑자기 생기가 타오르는 기분이었죠. 까마득하게 잊고 살던 음식이었는데….”

이 씨가 찾은 해답은 슬로푸드였다. 그는 식생활이 몸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고 우리 발효식품이 최고의 슬로푸드라는 결론을 내렸다. 2004년 경기 양평군에 터를 잡은 이 씨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는 남편의 타박에도 김치, 식초 등 발효식품 연구를 12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 씨는 2007년 자신이 연구한 김치를 선보이는 첫 발표회를 연 뒤 이듬해부터 미국으로 향했다. 인생의 장작불과도 같았던 김치에 대한 세계인들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씨는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의 유스호스텔을 공략했다. 유스호스텔에는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이 묵고 있어 홍보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한 번 행사를 열 때마다 평균 30여 나라 출신 300여 명이 다녀갔다. 어림잡아 2000여 명이 이 씨의 김치를 맛본 셈이다.

20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표회를 열었을 때는 유스호스텔에 묵고 있던 다국적 자유기고가들이 김치를 세계 전역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국과 프랑스, 태국 등에서 온 이들은 발표회가 끝난 뒤 처음 맛본 김치에 대해 지역저널이나 인터넷에 소개했다. 덕분에 해외 여행사에서 김치 체험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이 씨는 발표회 때마다 파인애플김치, 백김치 등 30여 가지 김치를 내놨지만 세계인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모두의 관심을 끄는 김치는 퓨전김치나 맛이 순한 김치보다 젓갈 냄새가 푹푹 나는 전라도식 겉절이와 묵은지 볶음밥이었다. 몇몇 유럽 여행객은 겉절이를 맛보고 이 씨에게 “김치에 마약을 넣은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건넸다고 한다. 멸치를 절여 발효시킨 서양식 젓갈과 유사한 진한 맛이 젊은 외국인들의 ‘집밥’에 대한 향수를 건드렸던 것이다.

10년 가까이 자비를 털어 김치 발표회를 연 이 씨는 “음식 세계화는 우리가 팔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걸 내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묵은지를 치즈와 버무려 피자처럼 구워내는 음식을 개발해 발표회에 내놨다. 이름도 친근하게 표현하기 위해 ‘김치 베이비’라고 지었다. 그는 “언젠가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김치 베이비도 세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포댁에서 김치 외교관으로 변신

혼자 힘으로 외국인 김치 체험 등을 준비하기 힘들어지자 생각한 것이 바로 김치 연구반이다. 내년 4월까지 1년에 걸쳐 100여 가지 김치를 전수해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를 배출하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16세기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나오는 가지김치인 ‘모점이법’부터 계절채소를 이용한 미나리김치 등 이미 30여 가지 김치를 전수했다.

처음에는 앞치마 두르는 것부터 어색해하던 이들은 김치 봉사 활동 기금 마련, 요리에 대한 관심 등 참여 계기는 달랐지만 어느새 다양한 김치가 주는 매력에 매료되어 갔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퇴임한 주부 이현숙 씨(66)는 “친구들을 만나 평소에 관심도 없던 김치를 배우고 있다고 하면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지만 김치를 통해 건강을 배우고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는 게 보람차다”고 말했다.

수목원을 운영하며 산삼을 재배해 온 주부 최혜원 씨(59)는 주부들이 더 이상 주방에 들어가지 않아 김치 고유의 맛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연구반에 합류했다. 최 씨는 “며느리와 딸에게 김치를 보내줘야 하는데 김장부터가 골치 아팠다”면서 “연구반이 끝나면 동네 주부들끼리 김장 품앗이를 하는 운동을 제안해 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이날 주부 7명이 5시간여에 걸쳐 완성한 김치는 여름 제철 전통김치인 가지갈래김치. 가지를 여덟 갈래로 칼집낸 후 데쳐 가지 속에 청고추, 홍고추, 양파, 마늘, 통깨, 생강, 절인 무 등을 간장에 버무려 채워 넣은 김치다.

이미란 씨가 김치연구반 주부 6명과 함께 만든 가지갈래김치(왼쪽 아래 사진). 가지갈래김치는 가지를 여덟가닥으로 갈래를 내 데친 뒤 고추와 양파, 생강, 절인 무 등에 간장을 넣고 버무린 양념을 채워 만든다. 여름에 수확하기 어려운 무나 배추 대신 가지를 주재료로 쓰고 젓갈 대신 간장으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란 씨가 김치연구반 주부 6명과 함께 만든 가지갈래김치(왼쪽 아래 사진). 가지갈래김치는 가지를 여덟가닥으로 갈래를 내 데친 뒤 고추와 양파, 생강, 절인 무 등에 간장을 넣고 버무린 양념을 채워 만든다. 여름에 수확하기 어려운 무나 배추 대신 가지를 주재료로 쓰고 젓갈 대신 간장으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날 완성된 가지갈래김치는 내년 2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릴 김치 발표회 밥상에 오른다. 이번 발표회부터는 이 씨 혼자가 아니라 연구반에 참여한 주부 일부도 동행할 예정이다. 금융인, 대학교수 등 지역 저명인사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내 ‘김치 외교’의 힘을 보여줄 각오다. 이 씨는 “김치는 발효식품이라 아무리 맛없게 담가도 기후, 발효 환경 등에 따라 어느 한순간만큼은 가장 맛있어지는 때가 온다”면서 “우리 김치도 시간이 지나면 세계에서 우뚝 서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양평=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발효 스콜레#김치#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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