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땐 피난선으로, 선거운동 수단으로…다양하게 활용됐던 어선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8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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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20년 동안 일군 운수업을 정리하고 1945년 귀국길에 올랐다. 현금을 갖고 귀국하지 못하니 어선을 한척 사왔다. 그리고는 본가에서 10리 떨어진 축산항에서 수산업을 시작했고, 성공해 대형어선 3척(삼화호, 삼중호, 삼광호)을 거느린 선주가 됐다. 이 어선들은 20년 동안 큰 역할을 했다. 우리 집 어선들은 본래 목적인 고기잡이에만 동원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다.

6·25 전쟁이 터지자 경북 영덕도 안전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과 선원들의 가족을 모두 태우고 방어진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다시 부산 영도로 내려갔다. 방어진과 부산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했다. 어선은 피난의 도구로서도 효용이 높았다. 육로로 가는 피난길은 사람도 힘이 들 뿐더러 인민군에 잡힐 우려도 컸지만, 바다를 통한 피난은 편하고 무엇보다 안전했다.

피난 중에는 통상 먹고 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어선이 있었으니 어획고를 올려 와서 생계가 됐다. 내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 입시 시험을 보러가서 영도에서 며칠을 묶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근처를 소상히 잘 알았다. 의아했다. 모두 피난시절 영도에 거주한 경험덕분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1952년 전선이 안정돼 축산항으로 복귀한 뒤 선출직 선거에 나선 할아버지는 어선 3척의 덕을 톡톡히 봤다. 사촌형의 어선까지 모두 5척을 동원해 영덕 해변가의 유권자들을 공략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막걸리 선거여서 술도가에서 막 나온 막걸리를 배에다 싣고 어촌 동네마다 들러 유세를 하고 유권자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했다고 한다. 선박으로 가볍게 이동하면서 물량도 한꺼번에 많이 실어 나를 수 있었으니 선거운동수단으로 어선보다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당선이 됐다.

또 어선은 아랫대에게도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해상법을 전공하는 손자에 큰 도움이 됐다. 해상법은 선박이 연구의 대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선을 경험했으니 친숙하고 항상 자신감이 묻어난다.

해운업계에서 존경하는 선배 사장님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상선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선배의 아버지도 1945년 해방 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시모노세키에서 작은 상선을 사와 고향 남해에서 연안운송을 시작했고 이것이 모태가 돼 선박회사가 됐다는 것이다. 내가 조부 얘기를 꺼냈더니 선배는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그날로 그 선배와 나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게 됐다. 할아버지의 어선은 그 선배가 나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는 좋은 수단으로 작용했다.

선대에서 25년 동안 가업으로 영위했던 수산업을 위한 어선들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했고,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1950년대에 찍은 삼중호 사진 한 장이 손주인 나의 수중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선대의 가업이 수산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선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모두 잊혀져갈 것이다. 그렇지만 문자로 남기는 글은 영원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김인현의 바다와 배’는 앞으로 3주 간격으로 연재됩니다. 꾸준한 성원 부탁드립니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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