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어느 날 내 계좌에 100억 원이 들어온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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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 오전 9시 31분.

지난해 4월 6일 그 시각, 서울 서초구 삼성증권 본사 사무실에서 한 여직원이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있는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조금 전 마우스 버튼을 눌렀던 손을 한 번씩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날은 삼성증권 주식을 보유한 자사 직원들에게 배당금을 주는 날이었다. 지급 담당인 그 여직원은 너무 ‘비싼’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주당 1000원의 배당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주당 1000주의 주식을 입고시켰다. 100주를 가진 직원이라면 배당금 10만 원 대신 한순간에 주식 10만 주(398억 원)를 갖게 됐다.

#. 오전 9시 44분.

본사 12층 회의실에서 기업금융2팀 4명이 영업회의를 하고 있었다. 팀원들은 이날 아침 갑자기 자사 주가가 떨어지는 게 의아했다. C 대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신의 주식 계좌를 열어봤다. “어! 이거 뭐야.” 계좌에 200억 원이 넘는 주식이 들어와 있었다. A 팀장, B 과장, D 주임도 계좌를 확인했다. 평소 잔액보다 끝자리 ‘0’이 3개 더 붙어 있었다.

#. 오전 9시 47분.

사측은 내부 전산망을 통해 ‘잘못 입고된 주식이니 팔지 말라’고 3차례 전파했다. 회의실에 있던 팀원들은 이를 못 본 듯했다. B 과장은 ‘매도 주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팝업 창이 떴다. ‘30억 원 이상 거액 주문입니다. 주문처리하시겠습니까?’ 그는 7만 주씩(29억여 원) ‘쪼개기 주문’을 했다. C 대리, D 주임도 따라 했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팀원들을 A 팀장은 막지 않았다. 함께 건넜다. 불과 3분 사이 이들이 팔겠다고 내놓은 주식 가치는 각각 205억~414억 원이었다. 회사가 즉각 봉쇄 조치에 나서면서 현금화는 되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서울남부지법 304호 법정. 말끔한 정장차림 남성 8명이 모여 있었다. 잘 닦인 구두에,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칼, 뿔테안경. 20대 후반~40대 초반의 지적인 인상이었다. 다만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기업금융2팀 4명 등 주식을 팔아치우려 한 혐의로 기소된 삼성증권 직원들이었다.

검찰은 세 가지 죄명으로 이들을 법정에 세웠다. ‘나의 이익은 누군가의 손해’인 주식시장에서 불공정 경기를 한 죄, 실제 갖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팔겠다고 속인 죄,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돕기는커녕 일확천금을 시도한 죄가 있다고 봤다.

이들은 대부분 검찰 조사에서 “순간 욕심이 났다”고 진술했다. 카카오톡으로 ‘주식을 팔면 어떻게 될까’ ‘회사 그만두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상의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표로 될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해고됐다. 회사로부터 55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도 당했다.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실제 손에 돈을 쥐지는 않았지만 손대지 말았어야 할 ‘매도’ 버튼을 누른 대가다.

10개월 전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선망받던 ‘엘리트 증권맨’이었던 피고인들은 이날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한순간의 어이없는 행동을 반성합니다.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두 자식의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었고 얻지도 않았습니다.”

삼성증권 오류배당 사고는 비슷한 판례를 찾기 힘든 초유의 사건이다. 담당 판사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 너무 어마어마해졌다. 법리를 치열하게 따져보겠다”고 했다. 그날 주식을 배당받은 직원 2018명 중 시장에 주식을 내놓은 직원은 22명이었다. 100명 중 1명꼴이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그 ‘1%의 선택’ 앞에 놓일 때가 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삼성증권#오류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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