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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세워진 ICO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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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세워진 ICO 척화비

박세준 기자 입력 2018-06-24 10:25수정 2018-06-2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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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블록체인 업체가 투자 받으려면 해외에 돈과 일자리 갖다 바쳐야
[shutterstock]

“한국 블록체인 업체가 재주를 넘어 암호화폐를 만들면 돈은 다른 나라가 버는 구조죠.”

최근 만난 한 블록체인 업체 대표가 탄식하듯 한 말이다.

세계 각국은 4차 산업혁명의 중요한 축인 블록체인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에 블록체인 기술의 결과물인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도 풀고 있다. 특히 암호화폐공개(ICO)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암호화폐에 가장 보수적인 정책을 써오던 중국마저 홍콩에서 ICO를 허용하고 나섰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여전히 ICO 금지를 고수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춘 국내 블록체인업체라도 ICO를 하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 해외에서 별도 회사나 재단을 설립해 자금을 모으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련 일자리는 외국인에게 돌아가고 있다.

나 못 믿어, 코인 못 믿어

올해 초 암호화폐 가격 폭락 이후 투자자들이 암호화폐시장을 떠났지만, 아직 꽤 많은 투자자가 암호화폐 거래를 하고 있다(왼쪽). 투자자들은 강연 등을 통해 암호화폐공개(ICO) 등 관련 기술을 자세히 검토해야 투자금을 잃을 확률을 줄일 수 있다. [뉴스1]
ICO는 블록체인 업체가 서비스 상용화 등을 위해 코인(혹은 토큰) 등 암호화폐를 팔아 투자금을 모으는 것. 기업공개(IPO)는 이미 수익을 내는 회사만 가능하지만 ICO는 수익이 없어도 발전 가능성만으로 투자 받을 수 있다. 그래서 IPO에 비해 위험성이 높은 투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위험성이 높을수록 수익도 커질 수 있다.

블록체인 업체가 내놓은 암호화폐가 거래소에 상장되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뛴다. 5월 5일 암호화폐거래소 ‘힛빗’에 상장된 MTC는 상장 후 가격이 10배가량 올랐다. 이후 업체가 서비스 출시에 성공하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면 다시 암호화폐 가격이 상승한다. 최근에는 증권이나 지분형 암호화폐도 늘어나는 추세다. 해당 업체의 사업이 수익을 내면 배당을 받을 수 있다.

블록체인이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힐 만큼 세계 각국은 ICO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대로 관리만 할 수 있다면 ICO를 통해 블록체인시장과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하지만 한국은 이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금융위원회(금융위)는 국내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ICO로 자금을 조달할 경우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위반으로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내에는 ICO보다 암호화폐를 사고팔며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자가 많았다. 올해 초 암호화폐 가격 폭락을 겪으며 암호화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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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ICO를 막고 나선 이유는 투자자 보호였다. 아이디어와 실현 방안을 적어놓은 백서로 투자자를 모으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는 것. 유사수신 행위 및 가짜 ICO 등 사기 범죄와 맞물릴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진행된 ICO 중에는 실패 사례도 상당히 많다.

2월 암호화폐 조사업체 토큰데이터와 비트코인닷컴이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진행된 902건의 ICO 중 418건(46%)이 실패했다. 142건은 애초 자금 조달조차 못 했고, 276건은 자금을 조달해놓고 실패한 경우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는 투자한 금액을 거의 돌려받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 준비는 물론, 일자리도 해결

위험성에도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높은 수익 때문이다. 2014년부터 암호화폐 투자에 뛰어든 직장인 임모(34) 씨는 “혼란스럽던 암호화폐시장도 최근 옥석을 가리는 정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명한 암호화폐는 가격 급등락을 겪어 이제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새로 공개된 암호화폐는 주요 거래소에 제대로 상장되기만 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ICO를 제도권으로 흡수,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는 4월 국회에서 ‘블록체인 정책 육성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용대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는 “ICO 전면 금지는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사기성 암호화폐 ICO가 우려된다고 하지만 이를 걸러낼 기술 평가 방식을 개발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무조건 막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ICO 허용에 가장 적극적인 스위스는 이미 규제 가이드라인을 확립했다.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위원회(FINMA)는 2월 암호화폐 규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암호화폐를 용도별로 지불형(payment), 기능형(utility), 자산형(asset) 등 세 가지로 구분한 것.

지불형은 화폐를 대체하려는 암호화폐를 가리킨다. 비트코인(BTC), 라이트코인(LTC) 등이 대표적이다. 기능형은 블록체인 기반 애플리케이션과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암호화폐, 자산형은 회사 수익에 참여하거나 배당, 이자, 지분 등의 역할을 하는 암호화폐를 말한다.

스위스는 이 같은 분류를 통해 암호화폐를 현행법에 편입시켰다. 자산형은 증권과 유사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증권법 규제를 받는다. 지불형은 자금세탁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반면, 기능형 암호화폐는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는다.

물론 여러 가지 성격을 한데 모은 암호화폐도 있다. 일례로 블록체인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팀(STM), 컴퓨팅 공유 프로젝트 골렘(GOLEM) 등을 기능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시에 암호화폐로 투자도 가능하므로 자산형의 면모도 지닌다. 이러한 암호화폐에는 자산형 규제가 적용된다. 최근 ICO를 진행한 블록체인 프로젝트 가운데 지불형 기능만 있는 암호화폐를 제외하면 대부분 증권과 유사한 기능을 갖추고 있다. 사실상 대다수 암호화폐가 증권법 규제를 받게 되는 것.

스위스 암호화폐 ICO특구인 CVA(The Crypto Vally Association) 규제당국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마티아 라타기 박사는 “각국이 암호화폐 관련 규제책을 만들지만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피하고 있다. 스위스에선 적극적인 ICO가 이뤄져 핀테크(금융+기술) 기술이 크게 향상됐다. 상당수 ICO가 실패하기 때문에 규제는 필요하지만 유럽 각국은 ICO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심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ICO 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 독일은 스위스와 비슷하게 증권형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를 준비 중이다. 영국과 싱가포르는 ICO 관련 규제 없이 모든 것을 해볼 수 있는 합법 공간인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했다.

유럽권에서 암호화폐에 가장 엄격한 태도를 취하던 프랑스도 최근 국내 ICO 허용 방안을 모색 중이다. 프랑스 재무부와 금융시장국(AMF)은 지난해 10월부터 블록체인 업체를 만나 ICO 규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암호화폐를 거래하지 못하게 막았던 중국조차 홍콩에서 ICO를 허용하면서 증권형 암호화폐만 홍콩 증권법을 따르게 했다.

해외에서 뜯기고, 대기업에 치이고

[shutterstock]
세계 각국이 ICO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경제적 이득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가진 업체가 ICO에 성공하면 돈이 모이고 일자리도 늘어난다. 또 법인세도 낸다. ICO를 허용한 미국은 실제로 일자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 회장은 6월 19일 열린 ‘제10회 아시아 미래 핀테크 포럼’에서 “스위스 추크주에서는 블록체인과 ICO 산업을 통해 최근 2~3년 동안 원 인구와 맞먹는 11만 개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추크주에서 진행된 ICO는 약 5억5000만 달러(약 6100억 원) 규모로 ICO시장 전체의 14%를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한국 블록체인 스타트업계다. 국내에서 ICO가 금지됐으니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ICO를 진행하려면 최소한 해당 국가에 재단을 만들고 해외 인력을 고용해야 한다. 만일 스위스에서 ICO를 하려면 현지에 유한회사를 설립해 현지인 회사 대표와 임원 3명을 고용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현지 이사 1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에 비해 높은 법인세도 큰 장벽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국가에서는 한국 기업에만 높은 세율을 붙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관계자는 “원천 기술 공개를 요구하는 국가도 있다”고 밝혔다.

해외 대기업과도 경쟁해야 한다. 최근에는 블록체인 스타트업 외에 대형 정보기술(IT) 기업도 ICO로 자금을 모은다. 이를 일반적인 ICO와 구분하고자 ‘리버스 ICO’라 부른다. IPO에 비해 훨씬 쉽게 투자금을 모을 수 있기 때문. 투자자의 반응도 좋다. 이렇다 할 수익이 없는 블록체인 스타트업과 달리 충분한 자금이 있는 대기업의 ICO가 더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암호화 메신저 텔레그램은 2월과 3월 두 차례 ICO를 통해 총 17억 달러(약 1조8800억 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모았다. 텔레그램은 이 자금을 자사 암호화폐 ‘그램’ 및 ‘텔레그램 오픈 네트워크(TON)’ 블록체인을 개발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TON은 이더리움처럼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를 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목표다. 일본에서는 라쿠텐과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이 각각 ICO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정대선 현대BS&C 사장이 ICO로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현대코인’이라 부르는 ‘에이치닥(Hdac)’은 지난해 스위스에서 ICO를 진행해 비트코인 1만6786개를 모았다. 6월 21일 코인마켓캡 기준 비트코인 개당 가격은 751만909원. ICO로 약 1260억 원을 모은 것이다. 이외에도 코스닥 상장 회사인 한빛소프트가 홍콩에서 ICO를 진행 중이다.

ICO 안 하면 블록체인이 죽나

에이치닥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리버스 ICO에 성공한 정대선 현대BS&C 사장. [뉴시스]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ICO시장이 활성화되자 국내에서도 ICO 허용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는 5월 28일 전체회의를 열고 투자자 보호라는 전제하에 ICO 허용을 검토하라는 내용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한국이 국내 ICO를 금지한다 해도 각 기업이 해외에서 ICO를 감행할 수 있고, 투자자도 해외 ICO에 투자가 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ICO에 대한 투자를 금지하지 않는 이상 투자자 보호라는 명목은 의미가 없다. 국내 ICO를 허용하고 관련 규제를 정비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블록체인 업계가 ICO 외에 벤처캐피털 투자 유치 등 기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블록체인이 중요한 기술이라는 점은 인정하나, 실력 있는 스타트업은 안전한 방법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블록체인 업계가 굳이 ICO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ICO를 거치면 그만큼 해당 서비스나 관련 블록체인 기술을 쉽게 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소수의 사람에게 기업의 핵심 기술 등을 공유하는 벤처캐피털 투자 유치와 달리, ICO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투자금을 모집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블록체인 업체의 백서를 읽게 되고, 관련 기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블록체인 기반의 SNS 스팀(STM), 질리카(ZIL) 등을 만드는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경우 해당 SNS 이용자를 늘릴 수도 있다.

투자를 유치하기도 쉽다. 일반적으로 스타트업이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으려면 지분을 나눠야 한다. 지분 공유 후에도 오랜 기간 협상을 거쳐야 투자금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ICO는 백서 공개만으로도 전 세계에서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스팀(STM) 개발진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약 9개월간 15억 달러(약 1조6600억 원)를 모았다. 이는 SNS 원조 격인 트위터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유치한 투자액과 비슷한 규모다.

‘블록체인 혁명’의 저자인 돈 탭스콧은 지난해 10월 방한해 “신생 기업에게 ICO는 훌륭한 자금 조달 방법이다. 일부 ICO는 망할 수 있고, 처음부터 투자금을 노린 사기일 위험도 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은 회사도 일부 망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44호에 실린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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