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이성계의 골칫거리 ‘호암산 호랑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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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 등산로에 조성된 석구상.
호암산 등산로에 조성된 석구상.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서울 금천구 호암산(虎巖山) 등산로엔 다소 우스꽝스럽게 생긴 동물 석상 1기가 있다. 관악산의 서쪽 끝 봉우리인 호암산 호압사(虎壓寺)를 기준으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석구상이 정남 방위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는 것도 이유가 있다. 호랑이·말·개는 궁합이 잘 맞는다는 오행설의 삼합(三合) 이론을 취한 구조다. 즉 정남쪽의 오(午·말) 방위에 위치한 개(戌)는 호랑이(寅)와 삼합을 이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의미다. 석구상은 방위를 중시하는 이기(理氣)풍수까지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석구상은 공중에서 하강하는 기운인 천기(天氣)가 응결된 혈 터에 세워져 있다. 호랑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배어 있는 터다.

필자는 석구상이 바라보는 방향인 북쪽의 호압사를 찾아갔다. 만만치 않은 바윗길을 따라 도착한 호압사는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을 법당으로 삼고 있었다. 약사전은 호랑이 꼬리의 핵심 부분을 누르는 위치였다. 지세(地勢)로 보면 살기에 가까운 강기(剛氣), 즉 호랑이 기운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자리였다. 약사전 바로 앞에 서 있으면 호랑이 기운이 실제 느껴질 정도다. 기적(氣的) 세계관으로는 호암산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것이다. 호암산은 조선 풍수의 술법이 총동원된 현장일 뿐만 아니라, 호랑이 같은 강건한 기상을 꿈꾸는 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터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호암산#호압사#석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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