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지도자 트럼프? “관심에 목마른 어릿광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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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과 분노/마이클 울프 지음/장경덕 옮김/492쪽·1만7000원/은행나무

시끌벅적한 패배 노렸던 트럼프… 전문가 하나 없이 행정부 꾸려
권력 암투와 미숙함 뒤섞인 백악관과 트럼프 실체 취재



멜 브룩스 감독의 유명한 미국 코미디 영화 ‘프로듀서(1968년)’는 일부러 망하는 연극을 만들어 투자자금을 가로챌 모의를 한 제작자들의 이야기다. 확실히 망해야 사기극이 탄로 나지 않는 만큼 ‘스프링 타임 포 히틀러’라는 히틀러 찬양 연극을 선택한다. 전 나치대원이 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엉망의 각본이다. 최악의 감독과 배우도 기용한다. 그런데 망할 일만 남았다고 들뜬 이들은 연극이 뜻밖의 대성공을 거두며 위기에 빠지고 만다.

가디언·USA투데이 등에 기사를 써 온 저자가 18개월 동안 트럼프의 측근 200여 명을 취재해 썼다는 이 책에 따르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트럼프의 당선 과정은 포복절도하는 이 코미디 영화의 압축판이다. 트럼프 캠프의 목표는 ‘프로듀서’ 제작자들의 것과 같았다. 예상대로 패배하고, 그 패배를 힐러리 탓으로 돌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가 되면 끝이었다. 이방카가 새엄마인 멜라니아를 조롱거리로 삼기 위해 친구들에게 한 말조차 이랬다.

“이 말만 할게. 그녀는 아버지가 출마하면 확실히 이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영화 같은 반전이 진짜 일어났다. 당선이 현실이 되자 주변에는 행정부를 질서 있게 꾸려갈 전문가가 없었다. 시시한 행적뿐이던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은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미국을 분열시킬 ‘트럼피즘’(트럼프식 극우 포퓰리즘) 야심만 구체화시킨다. 권력의 큰 축으로는 ‘재방카’로 불리는 ‘가족우선주의’가 부상한다. 비서실장이 따로 있지만 실세는 ‘파파보이’인 사위 쿠슈너이고, 딸 이방카는 첫 여성 대통령을 노리며 설친다. 이들의 권력 암투와 미숙함 속에 조율도 없이 연방수사국(FBI) 국장 해임이 결정 나는 등 우왕좌왕하는 행보가 이어진다. 총체적 난국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트럼프다.

미국 출간 일주일 만에 140만 권이 판매된 이 책의 유명세에는 백악관이 큰 기여를 했다. 백악관이 나서 판매 금지를 거론하자 책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란 기대감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반향이 컸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렇게 웃게 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트럼프를 향해 “빌어먹을 바보 같으니라고”라고 중얼거리는 루퍼트 머독이나 현안에 대해 “그(트럼프)가 이해하고 있나?”라고 반복적으로 물으며 의심하는 우파 언론인 로저 에일스. 배넌의 대답은 더 웃긴다. “그가 이해한 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정상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어릿광대’로, 그 측근은 오합지졸로 노련하게 희화화시킨다. 그의 표현대로 ‘벽에 붙은 파리’처럼 백악관에 집요하게 드나들며 취재한 끝에 밝혀낸 것은 블랙코미디 주인공으로 완벽해 보이는 한 희극적인 남자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시멜로 같은 남자”의 실체를 폭로하며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표지 사진으로 골라 넣은 것도 책을 읽고 보니 퍽 의미심장하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어쨌든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라 논픽션이기 때문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트럼프#화염과 분노#마이클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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