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과 동고동락… 유신말기 추방위기 겪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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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안동교구 50주년… 초대교구장 두봉 주교의 한국살이

경북 안동교구청 앞에서 손을 맞잡은 두봉 주교(오른쪽)와 권혁주 안동교구장은 “어려운 농민들과 함께 지내며 정의, 생명, 환경의 가치에 대해 배운 게 많다. 그들과 함께 50년간 사목 활동을 이어올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고 했다. 안동=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경북 안동교구청 앞에서 손을 맞잡은 두봉 주교(오른쪽)와 권혁주 안동교구장은 “어려운 농민들과 함께 지내며 정의, 생명, 환경의 가치에 대해 배운 게 많다. 그들과 함께 50년간 사목 활동을 이어올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고 했다. 안동=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비포장도로를 오가며 사목(司牧)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할 얘기가 끝이 없네요….”

23일 경북 안동교구청에서 만난 두봉(杜峰·본명 르네 뒤퐁·90) 주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 50년을 뒤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냈다. 이날 함께 만난 권혁주 안동교구장(64)은 “신학생 때 처음 뵈었던 두봉 주교님이 맡았던 교구를 이어받아 함께 축하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안동교구는 두봉 주교에 이어 1990년 박석희 2대 교구장이 임명된 뒤 2001년부터 권 주교가 책임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를 거쳐 1954년 처음 한국에 온 두봉 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한국의 안동교구를 맡아 달라’는 지시를 듣고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친한 프랑스 친구 중 한 명이 6·25전쟁에서 전사해 한국은 제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두봉 주교는 부임 후 줄곧 ‘지역사회를 도와 함께 성장하는 천주교’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뜻은 지금도 이어져 안동교구청은 ‘농촌사목’의 대명사가 됐다. 교구의 사정이 열악할수록 두봉 주교는 지역사회와 더욱 밀착했다. 안동이 유림의 본고장인 만큼 유학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직접 만나 보니 유림들은 예상보다 통하는 점이 많았다고 한다.

“솔직히 유교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림들을 만나 보니 정말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고 있더군요. 천주교와 맞닿아있는 지점이 많다고 느꼈죠. 다른 종교를 ‘타 종교’가 아닌 ‘이웃 종교’로 보는 바티칸의 정신과도 일치한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두봉 주교)

국내 16개 교구 중 가장 작은 교구를 꾸려온 만큼 고초도 많았다. 농촌사목은 곧 ‘가난한 교구’를 의미했다. 권 주교는 “신자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관할지역 인구가 178만 명에서 71만 명으로 줄었고, 본당의 수는 40개에서 17개로 줄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78년 농민들이 정부의 농업 정책에 반발할 때 두봉 주교도 집회에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추방명령을 받았지만 당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중재로 안동에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어려운 농민들을 위해 나섰기 때문에 천주교가 ‘믿을 만한 종교’라는 평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지역사회에서 얻은 신임은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는 신앙’으로 발전했다. 권 주교는 “가난은 함께 견디고 나누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기쁘고 떳떳하게’라는 교구의 사목 표어는 안동교구의 정신을 담고 있다.

“표어는 신앙인이 누리는 기쁨과 희망, 양심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 기쁘고 떳떳하게 삽시다!”(권 주교)

안동=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권혁주 주교#두봉 주교#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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