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쟁점화로 갈등만 불러… 또 발목잡힌 ‘의료 한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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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소송 공방 휘말린 국내 첫 영리병원 ‘제주 녹지병원’

제주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에 들어설 예정이던 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사업지인 뤼디그룹 측은 제주도가 외국인만 진료토록 하는 조건부 개설 허가를 하자 행정소송을 냈다. 제주도는 다음 달 4일까지 병원 문을 열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경고했다. 녹지국제병원 제공
제주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에 들어설 예정이던 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사업지인 뤼디그룹 측은 제주도가 외국인만 진료토록 하는 조건부 개설 허가를 하자 행정소송을 냈다. 제주도는 다음 달 4일까지 병원 문을 열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경고했다. 녹지국제병원 제공
“현 정부에서 영리병원을 추가로 추진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제주 녹지국제병원과 관련해 “병원 개설 허가권자가 제주도지사로 정해져 있어 발생한 특수한 경우”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발언은 영리병원에 대한 현 정부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2015년 12월 복지부는 중국 뤼디(綠地)그룹의 투자개방형 병원(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설립 사업계획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외국계 영리병원의 시험무대라는 평가까지 곁들였다.

그로부터 3년 2개월이 지난 올 2월 녹지병원은 ‘내국인도 진료할 수 있게 해달라’며 제주도와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제주도 역시 “3월 4일까지 병원 문을 열지 않으면 개설 허가 취소를 위한 청문절차를 밟겠다”고 응수했다.

이번 ‘녹지병원 사태’로 영리병원을 뼈대로 하는 한국 서비스산업 정책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리병원은 외국 환자를 유치해 국가의 부(富)를 키우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의료를 산업화하면 성장과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만 ‘병원은 이익을 추구해선 안 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제 때문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 병원문도 못 연 채 ‘내국인 진료 제한’ 논란



뤼디그룹은 부동산 재벌로 최대주주가 상하이시(市) 정부다. 2012년 제주도와 1조 원 규모의 제주헬스케어타운 사업협약을 맺은 뒤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2015년 2월 뤼디그룹은 영리병원으로 개발사업의 수익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 심사를 제주도에 청구했다. 같은 해 4월 제주도는 복지부에 사업계획서를 냈고 사업계획은 그해 12월 승인됐다.

문제는 정부와 제주도가 녹지병원 신청 단계에서는 내국인 진료를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주도 투자개방형 병원 개설 및 운영의 근거인 ‘제주특별법’에는 ‘내국인 진료 제한’ 규정이 없었다. 그렇다면 의료법을 따라야 하는데, 의료법은 진료 거부를 금지하고 있다. 복지부 역시 사업계획서 승인 당시 “내국인의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병상 규모를 감안할 때 국내 보건의료체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내국인도 진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3년 전 병원 개설 허가를 신청할 때 녹지병원은 당연히 내국인도 진료 대상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지난해 12월 녹지병원에 대해 제주도를 방문하는 외국인 의료 관광객만 진료토록 하는 ‘조건부 허가’를 하면서 논란의 불씨가 커졌다. 복지부는 ‘더 이상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은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까지 했다. 영리병원 때문에 의료비가 폭등할 것이라는 보건의료단체와 시민단체를 의식한 조치였다.

뤼디그룹 산하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 유한회사는 14일 제주지법에 개설허가 조건취소 행정소송을 냈다. 녹지병원 측이 제주도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가액이 800억∼1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 갈등 속 표류 중인 서비스산업 활성화

이번 논란은 일개 병원이 문을 여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잡음이 아니라 성과주의에 매몰된 정책추진체계, 부실한 법 규정, 갈등을 방치한 미진한 공론화 과정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다. 정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영리병원에 대한 ‘포비아(공포증)’를 두고는 제2, 제3의 녹지병원 사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많다.

영리병원 논의는 2002년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됐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의료 인력을 활용하면 의료를 산업으로 키워 새로운 먹거리로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참여정부는 의지가 더 강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과 2005년 연속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의료산업 등 지식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무총리실에는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를 설치했다.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게 한 제주도특별법이 생긴 것도 이때다.

그러나 영리병원 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영리병원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함께 추진했다. 보편적 의료보험이라는 민감한 영역으로 논의가 확산됨에 따라 영리병원 논의는 정치 쟁점화하며 사회적 갈등만 커졌다.

박근혜 정부는 의료법인 자회사에 숙박업, 국제회의업, 건물임대업 등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병원이 할 수 있는 일을 늘리는 효과는 있었지만 병원업 자체로 이익을 냄으로써 일자리를 확대하는 핵심은 놔두고 변죽만 울린 격이었다.

경제자유구역과 제주도에 영리병원을 지을 수 있게 제도를 만들고도 정책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정치 쟁점화했기 때문이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19일 국회 토론회를 열고 제주 영리병원을 공공병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영리병원이 무산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공공의료 화두를 꺼내 대립구도를 만든 셈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투자개방형 병원이 의료 기술과 서비스를 발전시켜 국민에게 더 나은 혜택을 준다는 논리를 적극 내세워 여론을 설득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의료 민영화’ 같은 이익단체 논리에 휘말려 서비스산업 활성화라는 본질을 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세종=김준일 jikim@donga.com / 이형주·김호경 기자
#제주 녹지병원#영리병원#의료 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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