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장자연 김학의를 보며 승리와 정준영이 배운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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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구청에서 단속 나오면 돈 좀 찔러주면 되고.’

‘왜 대처를 못했지? 어떻게든 보도를 막으면 되지 않나?’

‘(수갑) 차기 전에 1000만 원 준다고 했어.’

‘빅뱅’의 승리(본명 이승현·29)와 가수 정준영 씨(30), FT아일랜드 최종현 씨(29)가 카카오톡에서 나눈 대화에는 공권력을 만만하게 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이들은 각자 자랑하듯 성관계 상황을 설명하고 ‘강간이네’ ‘살인만 안 했지, 구속감 진짜 많아’ 등의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정 씨는 성관계 영상을 유출하지 말라고 사정하는 상대 여성에게 ‘동영상 지웠어’라고 카톡을 보내고는 다른 카톡방에 그 영상을 버젓이 올리기도 했다.

정 씨는 얼마 전 경찰 소환을 앞두고 “큰 죄책감 없이 행동했다”는 말로 사과했다. 그렇게 큰 잘못인지 미처 몰랐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태연한 범행은 죄책감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일까.

정 씨는 2016년 8월 한 여성으로부터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한 혐의로 고소당한 적이 있다. 그가 혐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당시 정 씨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수사기관은 정 씨의 거짓말에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당시 정 씨는 그 여성과의 성관계를 촬영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죄가 되는지는 여성이 동영상 촬영에 동의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여성은 촬영에 동의하지 않았던 증거라며 정 씨와의 성관계 상황을 녹음한 녹취록을 제출했다. 경찰은 녹취 내용만으론 동의 여부가 명확하지 않아 정 씨에게 당시 영상을 촬영했던 휴대전화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자 정 씨의 변호사는 휴대전화를 사설 포렌식(디지털 저장 매체 복구 및 분석) 업체에 맡긴 뒤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허위 서류를 냈다. 하지만 경찰은 의심하지 않았다. 정 씨 측이 휴대전화를 맡겼던 업체에 찾아가 ‘복원 불가’ 확인서를 써 달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했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정 씨가 뒤늦게 제출한 휴대전화를 포렌식한 결과 당시 성관계를 촬영했던 영상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정 씨가 성관계를 촬영한 것이 명백한 이상 설사 동영상을 지웠다고 해도 포렌식 과정에서 발견돼야 정상이다. 영상이 사라졌다면 정 씨가 사설 업체를 통해 증거를 인멸했거나 엉뚱한 휴대전화를 제출해 검찰을 속인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를 빼돌린 정 씨를 추궁하기는커녕 “동의 없이 촬영했다”는 여성의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마저 그냥 흘려보낸 정 씨의 휴대전화에는 그와 승리 등 연예인들이 저지른 충격적인 탈법 행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때 정 씨가 경험한 공권력은 숨기면 찾지 않는 공권력이었다.

‘잘 주는 애들로 준비시켜라’라며 성접대 지시를 했던 승리는 카톡에 그 말을 남기며 나중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고 염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자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접대라는 구태의연한 불법행위를 시도했던 그를 방송계에서는 ‘승츠비’(승리+위대한 개츠비)라고 치켜세웠다. 여성 착취를 사업 수완으로 미화하는 사람들 속에서 승리가 두려워할 게 있었을까.

2009년 장자연 사건, 2013년 김학의 사건은 공통적으로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지만 실체가 덮이고 책임자는 처벌을 면한 사건이다. 권력자가 저지른 성 착취는 피해자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마되는 것을 보면서 승리와 정 씨는 용기와 영감을 얻었을 법하다. 부실 수사는 하나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불의를 불러올 수 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장자연 사건#김학의 사건#승리#정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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