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과격한데 비겁한 검경 개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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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본 또 다른 공룡 될 우려 커… 대통령 인사권 견제하지 못하면
검경 수사권 조정은 의미 없어… 실질적 자치경찰 없는 유럽 국가
대부분 검찰이 수사지휘권 가져… 대신 사법평의회에서 인사 견제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경찰 내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전국 경찰서의 형사과와 수사과 사건을 총괄하는 또 하나의 괴물이 될 수 있다. 수사의 주도권이 검찰에 있든, 국수본에 있든 국민에게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수사권 조정은 대통령의 검경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고쳐야 할 단순한 핵심을 빼놓으니까 얘기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미국은 수사권이 경찰에 있다. 경찰관은 수사를 하고 나면 검사를 찾아가 이대로 기소하면 판사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지 의견을 구한다. 검사는 경찰관의 자문에 응하는 일종의 국가 변호사(attorney)일 뿐이다. 기소장에 서명도 검사가 아닌 경찰관이 한다. 이런 방식은 경찰이 주민 자치의 기관으로 생겨나고,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나라에서 가능하다. 이런 전통이 없는데도 무늬만 자치인 자치경찰을 하겠다고 하면서 경찰에 미국처럼 수사의 전권을 주려는 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핵심 내용이다.

우리나라 경찰은 미국 경찰과 달리 국민의 경찰이 아니라 국가의 경찰로 출발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찰의 전횡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고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태어났다. 검사는 법률의 전문가이지, 수사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부여한 것은 인권 보호 때문이다. 수사지휘권 혹은 최소한 수사종결권에 대한 검찰의 요구는 일리가 있다.

다만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주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정권으로부터 검사의 독립이다. 독일처럼 검찰권이 연방과 주로 나뉜 국가는 별도로 하고 우리나라처럼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는 ‘사법평의회’라는 기구가 있어 판검사 인사권을 행사한다. 사법평의회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참여하긴 하지만 합의체이기 때문에 전횡을 휘두를 수 없다. 이들 나라에서는 판검사를 ‘사법관(magistrat)’으로 통칭하고 검사에 대해서도 판사에 준하는 방식으로 인사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검찰 인사에 사실상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게 돼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든 단 하나의 요인을 꼽아보라면 검찰 인사권이라고 말하겠다. 수사권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국수본으로 옮겨가면 두 기관의 구성원에 대한 인사권이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들 것이다. 대통령에게 공수처장 후보를 2명 추천하는 방식에서는 그중 1명은 대통령 입맛에 맞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공수처 검사 인사위원회’는 과반이 친여 몫이어서 대통령은 자기 뜻에 맞는 사람들로 공수처 검사를 뽑을 수 있다. 국수본부장은 검찰총장보다 더 쉽게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뽑을 수 있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제도의 틀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제도는 오늘날 크게 달라졌다. 일본은 패전 이후 점령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주도로 자치경찰제를 통한 대대적 분권화를 시행한 후 경찰에 사실상 독립된 수사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이뤄냈다. 구속영장만 해도 법적으로는 검찰이 독점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검찰이 단 한 번도 반려하지 않음으로써 경찰 수사를 존중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검찰은 정권에는 피학적(被虐的)이고 경찰에는 가학적(加虐的)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검찰을 지배하고 검찰이 경찰을 지배하는 구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설설 기면서 경찰에는 상전 노릇 하려는 검찰을 떠올리면 검찰의 힘을 빼버려야 한다는 격한 기분이 들면서도 우리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경험을 봤을 때 경찰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함부로 없애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청와대가 지난해 내놓았던 누더기 같은 헌법개정안을 떠올려보라. 검경 개혁의 틀도 딱 그 수준이다.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은 대신 4년 중임제를 실시하겠다는 개헌안에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인사권을 어떻게 하겠다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현재 대통령의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임명은 국회의 동의조차 요하지 않는다. 개헌이 아니라 법 개정으로 가능한 그것마저도 고칠 생각이 없다.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니까 권한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변죽만 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검경 수사권 조정#형사사법제도#검경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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